<책 소개>
『부모를 위한 인문학』은 자녀를 훌륭히 키우기 위한 부모들을 위한 인문학을 소개한다. 저자는 자녀는 부모의 거울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자녀양육을 위해 부모가 먼저 변화하고 인격자가 되어야 함을 이야기한다. 이 책은 고전 인문학과 관련된 격언이나 일화, 심리학, 정신분석학, 교육학 등의 연구, 사례를 들어서 자녀의 교육에 대해 설명한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 어머니의 역할, 자녀를 양육할때 부모가 해야 할 행동,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팁 등 실증적이고 실용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교단에서 40년을 보낸 교육학자인 저자가 부모들에게, 또는 교육자에게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제시하는 책이다.
<작가정보>
노재욱
저자 노재욱은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한말 성리학자인 방려(芳旅) 노수오(盧秀五:1838~1908) 선생의 손자로서 약관의 나이로 초등학교 교사로 교단에 선 이후 40년을 교육과 저술활동에 일생을 바친 우리 시대의 진정한 교육자다.
미국 웨스트포트 대학교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객원교수로 활동했다. 강단에서 물러난 뒤에는 경기교육신보 편집국장 및 주필, 육군정보학교 전임강사, 한국방송연구소 상임고문 등을 역임하였으며, 사단법인 예지원의 연구위원으로 동양학 고전 강의를 하기도 했다.
현재 한국인성교육학회 이사장, 서울보건신학연구원 석좌교수 등을 맡아 올바른 인성교육의 전파를 위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저서로는 『노자강의』 『종교윤리』 『道(성서와 함께 읽는 노자)』 『완역 한비자』 『장자』 『구성기학』 등이 있으며, 각종 매체에 교육 관련 논문 및 칼럼을 다수 발표했다.
<책 속으로>
잘 가꾸어진 밭에서 자라는 어린 떡잎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미 기름진 토양에서 비바람을 고르게 받아가며 흠잡을 것 없는 환경에서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떡잎을 잘 가꾸어야 커서 재목이 되는 것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나무랄 데 없는 좋은 가정환경에서 유아기를 거친 아이들은 후에 어른이 되어서도 그 성품이나 소질이 남보다 뛰어나다.
결국 ‘어릴 때 가정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한 세대 전(약 30년 전)만 해도 어른들은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주로 바탕교육인 인성교육만 시켰다. 후천적인 교육의 초기단계인 생후부터 6살 유아기 때까지 가장 가까운 환경인 어른들의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 모든 것이 진화되어 사회가 전반적으로 달라졌다. 아이들의 교육 또한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정직하고, 성실하고, 부지런하기만 하면 누구나 살 수 있는 그러한 시대는 지나간 것이다.
16~17쪽
옛날 고전에서는 ‘못된 사람과 함께 어울리면 나도 함께 못된 사람이 되며, 먹을 가까이 하면 검게 되고, 붉은 주사를 가까이 하면 또한 붉은 물이 들게 된다’고 했다. 인간성을 보존하고 도덕성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환경을 이에 맞추어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곧고 길게 자라는 삼밭의 잡초는 누가 도와주지 않아도 그 본성대로 옆으로 퍼지면서 자라지 않고, 삼을 따라 위로 곧게 자란다. 사람의 양육도 마찬가지다. 앞에서 여러 번 이야기했듯이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은 본래의 성품 즉 인간성은 사단이다. 이 사단에서 출발한 칠정이 도덕성을 형성한다. 이 칠정이야말로 상대적이기 때문에 환경이다. 희喜의 상대가 있어야 기쁜 마음이 일어나고, 애哀의 상대가 있어야 애처롭고 가련한 생각이 일어나며, 사랑할 상대가 있을 때에 애정愛이 생긴다.
아이들에게 사람다운 인간이 되라고 윽박지르기에 앞서 아버지가 먼저 사람다운 사람 노릇을 해야 한다. 아버지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 자리했을 때만 아버지가 아니다. 가정의 핵은 사회에서도 이 나라에서도 중심이고 아버지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51쪽
도리는 사람의 기본 바탕으로서 누구나 갖추고 있어야 하며, 모든 것을 이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중국의 성현 가운데 한 사람인 맹자는 사람의 본성은 본래 착했다고 하여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다. 즉 사람이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는 선악의 구별도 없이 순수하여 분별없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구약 성서』 「창세기」 2장에는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만은 따먹지 마라. 그것을 따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고했다. 즉, 시비를 알게 되는 날 사람의 본성은 죽는다는 뜻이다. 이처럼 바탕을 그대로 간직하기란 지극히 어려워서 최소한 가르치고 기르는 바탕만이라도 그 성에 뿌리를 박아 놓자는 것이다.
그럼 선인들의 교육을 들여다보자. 인류사회에 공헌하기 위하여 우리의 선인들이 개발한 모든 학문이나 행적을 보면 사랑(인=仁)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인간을 대량으로 살상하는 무기만 봐도 그 기저에는 선량한 인간을 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단서가 깔렸다. 또한 당장 먹고 죽는 독약도 애초에는 사람을 질병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하여 약초를 연구하다가 발견하게 된 것이다. 농산물 공해만 해도 먹을 것이 모자라 식량을 증산하기 위해 개발한 각종 비료나 농약이 공해로 규탄받게 된 것처럼 말이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음 쓰기에 따라 화합이 되거나 대결 상태가 되어 싸우게 되기도 한다. 아무리 첨단 과학이라도 그것을 조작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결과는 선과 악이란 극단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일은 사랑과 의로움과 질서와 옳고 그름이 바탕을 이룰 때 비로소 인간다운 일이 된다.
85~86쪽
옛날 중국의 성군인 우禹라는 임금이 있었다. 그는 치산치수治山治水를 위해 9년 동안 나라 일에 몸 바쳤다. 물을 다스리는 9년 동안 집안일을 돌보지 않고 오직 치수공사에만 전념했다. 공사하는 중간에라도 집에 들러 가족을 보면 좋으련만, 가족을 보면 정에 이끌려 큰일을 그르칠까 봐 이를 악물고 집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한 가정의 중심이며, 한 사회에 있어서도 핵심을 이루고 있다. 때문에 아버지는 사회생활에서 끊임없이 의리와 인정의 얽매임에 당면하게 된다. 인간생활에는 계약주의나 합리주의적인 제도권 안에서만은 살 수 없는 여러 가지 요소가 많다. 그러나 위의 일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아버지는 자기 자신을 이기는 용기가 있다. 아버지의 용기와 자각은 이타심利他心 없이는 불가능하다. 때문에 아버지는 개인을 버린다. 한 가정의 가족이면서 가족이 아닌 것이다. 가족을 대표하여 가정보다 더 크고 넓은 사회의 핵심을 구성하는 것이 아버지라는 존재다. 이처럼 깊고 넓은 자기 인식 없이는 가정의 바탕이 될 수 없다.
일단 자신의 가정보다도 사회를 건전하게 살려야 그 사회 속에서 행복한 가정이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아버지가 되어라. 그렇다고 자녀들에게 집을 가볍게 알고 무시하는 아버지의 이미지를 남기면 안 된다. 집에 충실하면서 집보다 더 넓고, 인간이 많이 살아가는 사회를 위하여 일한다는 정신을 남겨야 한다. 아버지를 자주 볼 수 없는 아이에게 올바른 아버지의 심상을 심어주라는 것이다. 그래야 여성화되어 가는 자식들을 굳세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람다운 사람으로 기를 수 있다.
204~205쪽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흔히들 “세대차이가 있어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세대차이를 좁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 유일한 방법은 대화기법對話技法에 있다.
* 모처럼의 기회를 만들어 자녀와 대화할 때, 부모가 말하는 시간보다 자녀의 말을 들어주는 시간이 길어야 한다. 3대 7정도가 좋다.
* 대화 중에 자녀의 말을 끊거나 부정하지 말고, 무조건 ‘응! 응!’ 하고 듣고 있다가, 나중에 짧은 시간을 이용하여 옳고 그름을 말해줘야 한다.
* 아이가 슬픈 이야기를 하면 “응 정말 슬펐겠구나.” 기분이 좋아 날뛰며 말하면 “얘야 듣자니 엄마도 즐겁다.”는 등 장단을 맞춰 주면 대화는 순조롭게 진행된다.
이렇게 노력하면, 평소에 말수가 적던 아이도 말문을 트게 된다. 습관화가 되면 아이는 부모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나, 밖에서 친구들 특히 이성異性과의 사이에 일어났던 얘기까지도 털어놓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자녀들이 지껄이는 하찮은 말이라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설령 부모의 생각으로는 달갑지 않더라도, 그것이 올바른 내용이라면 깨끗이 인정한 뒤에 자기 생각을 덧붙여 주는 것이 좋다.
256~257쪽
부모를 위한 인문학 / 노재욱 (U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