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나는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이다』에 등장하는 아모레퍼시픽은 개성상인의 정신을 근간으로 70년간 성장을 거듭해 온 장수 기업이다. 평균 기업 나이가 22세에 불과한 대한민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사례로, 사업 활황기에 본업을 멀리하고 다각화에 힘쓰는 여타 기업과 달리 ‘화장품 기업’이라는 간판을 사수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왔으며 이를 실현한 기업이다. 동백기름을 짜던 광복둥이 기업이 세계 시장에서 사랑받은 대한민국 대표 화장품 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창업자 서성환 회장이 겪어야 했던 도전, 좌절, 극복의 과정은 절대 녹록지 않았다. 이 책은 서성환 회장의 경영철학과 기업사를 통해 우리가 등한시했던 기업 정신의 중요성을 짚어보고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생존 전략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볼 계기가 될 것이다.
<작가정보>
서성환
저자 장원 서성환(粧源 徐成煥 1924-2003)은 평생을 우리나라 화장품산업과 녹차산업에 바친 사업가로, 1924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나 개성에서 성장하며 화장품을 가내수공업으로 제조하던 가업을 이어받았다. 1945년 해방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사업에 헌신하여 마침내 태평양화학을 설립하고 물밀 듯이 들어오는 외제 화장품에 맞서 아모레라는 당당한 국산 화장품 브랜드를 창출하였고 나아가 우리 화장품이 세계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우리나라의 차 문화가 쇠퇴해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일찍이 제주와 호남에 차 재배단지를 성심으로 일구어 설록차를 생산해냄으로써 전통 녹차의 대중화에 크게 공헌했다.
한미자
저자 한미자 작가는 1962년 경기 화성에서 태어났다. 아모레퍼시픽과 인연을 맺어 기업의 역사와 정신을 기록한 『아름다운 집념-오설록이야기』 『미의 여정 샘내강바다(아모레퍼시픽 사사)』 등의 책을 냈다.
그는 이 책 『나는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이다』를 혼신을 다해 탈고 중이던 2015년에 생명(生命)의 사명을 다 하고 작고했다. 그의 삶을 되짚어 보면 ‘생(生)은 하늘이 우리에게 내린 명령(命), 그래서 생명(生命)’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책 속으로>
프롤로그 오래된 여권
장원粧源 서성환徐成煥은 2003년 1월 9일 세상을 떠났다. 무심한 세월 앞에 여권의 검은색 표지는 희끗한 청회색으로 변색되었다. 그러나 여권에는 세계를 향해 나아갔던 야심찬 젊은 사업가의 꿈과 열정이 오롯이 남아 있다. 그에게 유럽에서 만난 기계화 된 시설과 기술력은 놀라움을 넘어 충격이었다. 아울러 더 견고하고 큰 뜻을 키우는 발화점이기도 했다. 그 다짐이 유럽 진출의 꿈이라 해도,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화장품을 만드는 일이라 해도, 그 길은 분명 멀고도 험할 것이었다. 서경배 사장에게 레지옹 도뇌르 수훈의 감동은 그 길을 걸었던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이었다.(16쪽)
제1장 꿈엔들 잊힐리야
자신에게 믿음과 기쁨을 주는 상대에게 관심과 애정이 더 가는 것은 부모 자식 사이라 해도 다를 바 없었다. 어머니는 장원에게 본격적으로 일을 가르치기로 했다. 또래에 비해 일찍 철든 아들에게 미안했지만 고맙고 기특한 마음 또한 컸다. 장원은 여러 형제 가운데 어머니의 기질과 성격을 빼다 박은 것처럼 닮은 아들이었다. 장남인 열두 살 위의 형은 천성이 느긋하고 온후한 아버지를 그대로 닮았다. 형은 장사 수완이나 손끝이 조금 무뎠다. 사업을 이끄는 어머니의 기준으로 볼 때는 더 그랬다. 장원을 향한 그녀의 마음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애틋하고 자상한 성품은 아니었던 그녀는 짤막한 말 한마디로 16살 장원에게 자신의 속내를 전했다. “내 일을 거드는 게 아니라 네게 일을 주겠다.”(57쪽)
제2장 경계에 놓인 사람들
어느 날 장원은 ‘장사를 해볼까?’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장사를 알고 있다고 믿었다. 장사라면 이곳에서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가 개성에서 처음 장사를 시작했을 때 상황을 생각해보았다. 여자의 몸으로 아는 사람도 없는 곳에서 어머니가 선택한 일이 장사였다. 자신은 군대에 오기 전까지 장사를 했던 사람이었다. ‘그래, 장사를 해보자. 장사를 하며 귀국할 때까지의 시간을 버텨보자.’ 궁하면 몸에 익은 일이 생각보다 먼저 나오게 마련인지도 모른다. 장원은 우선 제대할 때 배급받은 쌀을 팔아 일부를 싸라기로 바꾸고 나머지 돈으로는 염색약을 샀다. 그런 다음 군복을 염색하여 비싼 값에 팔고 현지의 싸구려 옷으로 바꾸어 입었다. 그렇게 하고 나니 얼마간의 돈이 손에 쥐여졌다. 동료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권유했다. 오직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었다.(86쪽)
제3장 어두운 바람과 성난 파도의 시대
서울로 올라온 장원 일가는 남대문시장 부근 남창동에 자리를 잡았다. 남창동 일대는 크고 작은 도·소매상들이 올망졸망 자리 잡고 있어 초라하긴 했지만 시장의 활기만은 그런대로 살아 있었다. 이곳에는 개성 사람을 비롯한 월남한 실향민들이 적잖이 모여 터를 잡고 있었다. 장원에게는 낯선 곳이 아니기도 했다. 예전에 원료 구입을 위해 왕래하던 남대문시장이 맞닿아 있었다. 남창동은 서울에 아무 연고가 없는 그의 가족이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1947년, 일가는 그 남창동 한쪽에 ‘태평양화학공업사太平洋化學工業社’ 간판을 내걸었다.(113쪽)
제4장 1954년 서울
1954년 구용섭 씨가 입사했다. 그의 입사를 계기로 우리나라 장업계 최초로 연구실이 만들어졌다. 고작 용산 후암동 공장 화장실을 개조해서 만든 초라한 연구실이었지만 당시로선 선구적인 사건이었다. 그 무렵 국내 화장품 회사들은 연구에 대한 개념이 철저하지 않았다. 사실 초창기 연구라는 것도 별것은 아니었다. 견본이 될 만한 외국 제품을 수집해서 똑같이 만들기를 거듭해보고 비슷한 제품이 만들어지면 신제품으로 출시해 판매하는 게 연구의 출발점이었다. 가령 장원이 성공시켰던 식물성 포마드도 포마드 원재료에 일제 수입 완제품을 섞어 만들어보는 ‘연구’에서 출발해 탄생한 제품이었다. 이론적 토대가 없는 조건에서의 연구라는 것은 끊임없이 부작용 여부를 확인하며 가장 비슷한 구조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일련의 과정이었던 셈이다.(164쪽)
제5장 하늘 아래 새로운 곳
장원 일행은 영접 나온 코티사 중역의 안내를 받아 호텔로 향했다. 몸은 긴 시간의 비행으로 물 먹은 솜처럼 무겁고 피곤했지만, 동승한 코티사 사람들의 구김살 없이 얼굴에 밴 따뜻한 미소와 정중하면서도 명랑한 말씨가 그 고단함을 잊게 했다.(중략) 코티사 직원의 안내로 장원은 센 강변에 위치한 코티사에 도착했다. 회사는 3층 건물로 1만여 평이 훨씬 넘는 넓은 땅 위에 우뚝 서 있었다. 백년 가까운 세월이 깃든 역사의 공간이면서 오늘도 세계적인 품질과 우수성을 자랑하는 갖가지 화장품을 무한정 쏟아내고 있는 생산의 현장. 장원의 눈에 그곳은 공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전통 있는 대학 캠퍼스에 가까워 보였다. 인사를 나눈 뒤 장원은 공장장의 안내를 받아 공장 견학을 시작했다. 공장에서는 온갖 화장품이 거의 다 생산되고 있었다. 모든 생산 공정을 자동화한 현대식 시설, 즐비하게 늘어선 수십 개의 원료 저장 탱크 따위는 보기만 해도 부러웠다. 입안에서는 연신 ‘환상적’이라는 말이 맴돌았다. 공장 방문은 3일간 이어졌다. 장원은 하루하루 생산 공정과 공장 내부를 샅샅이 돌아보며 자주 발걸음을 멈췄다.(200~203쪽)
제6장 희망은 길과 같다
장원은 사례 연구와 내부 검토를 거쳐 방문 판매를 도입하여 새로운 유통 경로 개척에 나섰다. 방식은 에이본이 아니라 회사와 판매원 사이에 특약점이 있는 폴라 쪽을 참고했다. 정서와 관습이 비슷한 우리에게는 폴라 방식이 더 적합하리라는 판단이 들었고, 도매상을 특약점으로 흡수하여 예상되는 반발을 줄이는 동시에 신속히 조직을 꾸릴 수 있는 이점을 고려한 때문이었다. 방문 판매가 성공적으로 정착, 운영되려면 실로 많은 요소들이 결합되어야 했다. 그러나 장원 생각에 그 가운데 특히 핵심을 이루는 것은 제품, 조직, 인력이었다. 방문 판매 전용 브랜드의 개발, 시장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그물 같은 체인점 망의 구축과 확장, 잘 훈련된 우수한 판매원의 확보가 관건이었다. 이 전제 위에 무수한 보조 장치들이 가세해야만 방문 판매는 비로소 온전히 작동될 것이었다. 장원과 태평양은 이런 것들을 차근차근 끈기 있고 치밀하게 준비하고 실천해갔다.”(264쪽)
제7장 발 앞 한 자 안은 어디든 평지
정부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과 국내 매출의 고속성장에 힘입어 시작된 아시아 공략은 1970~80년대 장원에게 최대의 화두이자 열망이었다. 태평양은 1977년 6월 타이완에 삼미화장품 수출을 시작으로 아시아 인근 국가로 진출하는 날개를 폈다. 1978년 도쿄지사 현지 법인 설립과 함께 장원은 무역부장이던 박병철 씨를 일본 법인장으로 발령했다. 일본에 귀화한 형님 덕분에 그 역시 일본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수출에 시동이 걸리면서 아시아 모든 지역이 장원의 목표 안에 들어왔다. 꿈은 이루기 위해 있다는 말처럼 1988년 3월에는 태국 사하그룹과 합작으로 타이아모레를 설립했고, 이어 6월에는 홍콩 현지 법인을 설립했다. 1989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삼미진]을 수출하는 성과를 올렸으며, 같은 해 3월과 6월과 7월에는 퍼시픽 아모레 말레이시아 합작회사 설립, 타이완 현지 법인 설립, 말레이시아 메이크업 쇼 개최가 차례로 이루어졌다. 이어 1990년에는 말레이시아에 합작회사 설립 계약, 1991년 12월 말레이시아 포토클랑에 공장 준공이 이어졌다. 같은 해 3월 삼미진 화장품 사우디 독점 판매 계약 체결까지 인삼을 원료로 한 화장품 삼미는 아시아 공략을 위한 최대의 아름다운 병기가 돼 주었다. 그 기세가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는 불길처럼 거침이 없었다. 장원이 처음 일본 진출을 꾀했을 때 일본은 넘어야 할 산이자 극복해야 할 커다란 과제였다. 그러나 일본은 그에게 아시아를 거쳐 세계로 나가는 교두보가 돼주었다. 일본 진출은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놓은 디딤돌, 더 깊은 물을 퍼올리기 위해 부은 마중물이었다.(341~342쪽)
제8장 시대가 안긴 뜨거운 선물
“1991년의 파업이 태평양 역사상 최대의 위기이자 전환점이었습니다. 그게 모든 걸 바꿨으니까요. 그 상태로는 공멸 이외에 다른 길이 없었지요. 그래서 회장님과 저는 ‘만약 우리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고민했습니다. 그때 회장님은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을 만들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화장품 외길이야말로 당신의 꿈이고 삶 자체여서, 화장품 없는 자신의 인생은 아무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길이 보였고, 할 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마음은 고요해졌고 결심은 단단해졌습니다.”
장원과 서경배 사장의 공통적인 고민은 ‘태평양은 왜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나? 세상이 태평양에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존립 근거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앞으로 태평양이 나아가야 할 길 찾기였다. 그 해답은 바로 소명으로의 복귀, 끝내 버릴 수 없는 존재 이유로의 회귀였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 이것이 최대의 위기를 돌파하는 최선의 방책이자 원칙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479~480쪽)
나는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이다 / 서성환, 한미자 (U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