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황금펜 영상문학상 수상작,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선정작, 고대문학신예작가상 수상작.
조선 역사에 유일하게 살아있는 왕의 아버지.
상갓집 개를 자처하며 파락호로 지내다가 둘째 아들을 왕으로 만든 흥선대원군 이하응.
왕 위에 서서 왕보다 강력한 권력을 휘두른 인물.
가장 밑바닥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치고 올라간 파란만장한 삶을 문인화의 관점으로 색다르게 조명한 작품.
흥선대원군의 호는 석파, 흥선대원군은 힘없는 왕족으로 숨죽여 살아야 했던 비통의 세월을 석파란으로 표현했다.
석파란은 최고의 경지에 오른 묵란으로 평가되며, 석파란의 심미적 완성 과정을 이 책에서 볼 수 있다.
<저자 소개>
류서재
- 고려대학교 문학 박사
- 201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상, 고대문학신예작가상
- 장편소설 〈초희〉, 〈석파란〉 등
<책 속으로>
(15쪽)
기와 담장 주위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리가 없었기 때문에 움직임이 없었고, 움직임이 없었기 때문에 평화로웠다. 조대비는 조용한 평화를 눈으로 음미하듯 바라보았다. 소소한 나무들 사이에서 울음을 우는 새는 없었고 화려한 꽃들 사이를 나비가 날고 있었다. 소리가 없었기 때문에 나비의 율동은 움직이는 그림처럼 보였다.조대비는 방문을 열면 그림처럼 들어오는 풍경을 좋아했다. 방문으로 보이는 꽃들은 액자를 걸어놓은 것처럼 크기가 꼭 맞아야 했다. 조성하는 방문 크기에 맞춰 꽃을 심었다. 꽃 주위 돌에는 천년의 시간을 의미하는 목숨 수壽 글자를 음각했다. 철쭉 옆으로 매발톱꽃이 야생냄새를 풍겼고 매발톱꽃 옆으로 가막살나무, 때죽나무, 오동나무 잎들이 비밀스런 그늘을 만들었다.방문이 많은 집이어야 했다. 사방으로 벽보다 방문이 많아서 바람이 수시로 드나들어야 했고 마당에는 꽃들이 계절 따라 피어서 꽃이 없는 날은 없어야 했고 햇빛, 비, 눈이 하늘에서 자유롭게 내리는 대로 볼 수 있어야 했다. 조대비 말에 따르면 자연은 자유롭지 않고 질서정연했다. 조대비가 원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질서였다.
(32쪽)
탕! 탕! 탕!이하응은 사랑방에서 난을 치다가 어깨를 움찔했고 붓질은 어긋났다. 총소리를 들으며 붓을 댄 순간 난엽은 그 자리에서 푹 꺾여버렸다. 귓가의 총소리는 사라졌고 종이에 남은 것은 빗나간 선이었다. 이하응은 화가 난 표정으로 종이를 마구 구겨서 방문으로 휙 던졌다. 방문 앞에는 종이 뭉치들이 나뒹굴고 있었다.집이 창덕궁과 가까운 탓이었다. 금년 들어 농민들은 서너 달에 한 번꼴로 궁궐 앞에서 시끄럽게 시위했다. 수문군들이 모두 붙잡아 신분 조사를 해보면 농민들도 아니었다. 과거에 농사를 지었든 장사를 했든 지금은 생계가 막막한 양민들이었다. 수문군들 입장에서는 농민들을 붙잡는 일도 시들해진 모양이었다.이 세상 어디가 도원桃源이냐. 도원은 아득한 거리에서 등 돌리고 있구나. 싸움 끝에 남은 적막을 책임질 자는 누구냐.이하응은 남은 먹물로 글자를 휘갈겨 쓰고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지독히 권태로운 날들이었다. 총소리가 들려도 권태롭기는 마찬가지였다. 방안에 칩거한 지 달포가 지나있었다. 기방에서 잠을 자거나 술 먹고 시회 패거리와 싸움질하다가 그것도 싫증이 나면 종친 모임에서 바둑을 두다가 바둑판을 엎어버렸다. 어쩌다가 술기운에 김병기 멱살을 움켜쥐고 주먹을 날리면 기분은 화끈하게 풀렸는데 거물을 건드린 만큼 후환이 컸다. 언제 어디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지 모를 일이라서 적어도 한 계절은 방안에서 두문불출해야 했다. 김병기를 교방에서 만났다가 술상을 엎어버린 이후로 지금은 얌전히 앉아 묵란을 치는 중이었다.
(47쪽)
먼 하늘은 늦여름의 물기를 왕창 떨어트리고 있었다. 시야가 지독하게 흐린 날이었다. 이하응은 희뿌연 산길을 따라 올라가고 있었다.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안개는 한 발자국씩만 물러섰다.어딘가 웅숭깊은 샘물이 있어서 차디찬 허공으로 흰 빛깔을 계속 뿜어내는 것 같았다. 이하응은 안개로 꽉 차 있는 길을 걸어가다가 저도 모르게 아, 심호흡을 했다. 안개 속에서 맥문동 꽃밭을 딱 마주친 순간 가슴은 선택된 색깔로 흐려졌다. 뿌옇게 퍼진 황금색 바탕에 이리저리 검은 선을 그은 몽유도원도처럼 뿌옇게 퍼진 흰색 바탕에 이리저리 보랏빛 선이 그어진 풍경이었다.맥문동은 꽃대가 긴 보라색 꽃이었다. 하늘로 솟은 기다란 꽃대들 때문에 창을 든 병사들처럼 보였다. 기다란 꽃들은 셀 수 없이 빽빽했고 촘촘했다. 사열 중인 병사들처럼 질서 있게 피어있는 꽃무리였다. 보랏빛 꽃무리는 눈동자에 강하게 휘감겨들었다. 창을 든 병사처럼, 천을 뚫는 바늘처럼 날카롭게 보이는 꽃들이었다. 이하응은 맥문동 밭을 넋 놓고 쳐다보다가 꽃대 하나를 슬며시 꺾어 들었다.
(227쪽)
한집안 싸움이었다. 다 같은 조선 사람이라서 적은 분명하지 않았고 게다가 이파전이 아니라 삼파전이었다. 이하응은 흰 알을 꼭지에 놓고 검은 알을 하나씩 집어 들어 꼭지 아래 왼편과 오른편에 각각 놓았다. 전형적인 삼각형 구도에서 흰 알은 왕이었고 두 개의 검은 알은 백성이었다. 힘의 역학으로 따져보아도 밑바닥에서 균열을 일으키면 꼭대기는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 동학이나 서학이나 구별할 것 없이 결국에는 계층 이동 싸움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동학과 서학이 한편이었고 성리학이 상대편이었다.그러나 백성들은 동학과 서학으로 또 갈라졌다. 양편의 백성들이 모두 성리학을 공격하는 것이라면 성리학이 무너지는 자리에 서학이 치고 들어올 것인가, 동학이 치고 들어올 것인가. 오백 년 이 씨 왕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세상이 온다 해도 백성들은 그들이 원하는 지상 천국을 이룰 것인가.이하응은 삼각형의 꼭지 성리학을 내려놓았다. 동학을 한편으로 두고 서학을 상대편으로 둔다면 결국에는 조선의 정체성 싸움이었다. 허면 어느 쪽이 더 많이 조선의 백성을 끌어들일 것인가. 성리학이 한편이고 동학이 상대편이라면 내란이 일어날 것이었다. 성리학이 한편이고 서학이 상대편이라면 국제 전쟁이 일어날 것이었다. 성리학은 어느 편과도 전쟁을 해야 하고 성리학이 무너지면 새로운 세상이 온다.혼자 두는 바둑판은 깊은 생각으로 이끌었지만 재미는 없었다. 이쪽 편을 드나 저쪽 편을 드나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특별한 묘수는 없었다. 절망만 확인할 뿐이었다. 정도전이 조선을 설계할 때부터 조선은 백성이 주인인 나라였다. 오백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새삼스러운 문제였다. 허나 조선에서 어떤 왕이 천제를 대신할 정도로 강한 왕권을 휘두른 적이 있었던가. 이하응은 수심에 찬 눈을 들었다. 조선은 밤을 지낸 수탉이 홰를 치는 것처럼 부활해야 한다.
(509쪽)
이하응은 혼곤한 의식 속에서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하늘은 나의 편이라는 생각이 점점 강해지는 날에 꾼 악몽이 호사다마의 의미는 아닐 터였다. 이하응은 자꾸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를 쓰는 자신을 생각하면서 쓸쓸히 웃었다. 인간이란 거센 물살을 탄 거품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하늘의 운수를 따지곤 했다. 가슴 깊은 곳에 숨어있던 생각들은 때때로 하늘이란 이름을 달고 힘을 가지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하늘이라니. 하늘의 소리라니. 꿈속이야말로 헛것들이 돌아다닐 수 있는 가장 무방비한 상태가 아닌가.꿈에서 최제우는 왕이 되어 있었다. 왕이 아닌 자가 왕이 된 모습은 당당했고 자연스러웠다. 최제우는 오른손에 죽창을 들고 맥문동 꽃밭에 서 있었다. 흐릿한 안개가 푸른 나무들 속으로 실뱀처럼 스며들고 그의 오른편에는 천어天語를 들었다는 최시형이 서 있었다. 성리학은 이미 운수를 다했다고 최제우가 외치고 있었다. 이하응도 안개 속에 서서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외칠수록 죽창을 든 최제우는 백 명, 천 명, 만 명으로 불어나고 있었다. 아, 맥문동 꽃밭의 안개. 시야를 가린 안개는 천지를 가득 메우며 살갗을 차갑게 스쳤다. 땅도 하늘도 보이지 않았다. 지독한 안개였다.
<출판사 서평>
[추천사]
난세에 난초를 그리다
정은경(문학평론가, 중앙대 교수)
『석파란 』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이야기이다. 고종의 아버지로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19세기 말 어지러운 조선과 국제정세 속에서 민비와 정치적 대결을 하다가 결국 물러나고 난, 이 풍운아의 이야기는 다양한 방식으로 스토리텔링 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 』을 비롯하여 ‘명성왕후’를 다룬 드라마, 연극 등에서 ‘흥선대원군’은 주연으로, 조연으로 많은 역할을 맡아왔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왕손으로 태어났으나 젊은 시절 파락호로 시정잡배들과 어울려 다니며 불우한 생활을 했다는 것, 어린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19세기 말 부패한 조선 사회를 개혁하는 한편 외세와 맞서고, 며느리 민비와 정치적 대결에서 패배, 결국 조선의 쇠락한 운명과 함께 사라졌다는 드라마틱한 삶에서 비롯된 것이다. 개인의 삶뿐 아니라 조선이라는 국가의 운명이 요동치고 있는 이 문제적 인물의 이야기는 장르를 불문하고 많은 작가들에게 모티브를 제공해왔는데, 그러나 그것은 주로 ‘정치적’ 측면에서였다. 이하응은 왕의 살아있는 아버지 ‘흥선대원군’이고 이전의 세도가인 안동 김씨를 몰아내고 각종 개혁을 단행했으며, 외세와 대결하여 쇄국 정책을 폈던, ‘난세의 영웅’ 혹은 조선의 몰락을 앞당겼던 ‘국수주의’자로서만 주로 이야기되어 왔다는 것이다.『석파란 』의 작가는 여기에서 지워진 ‘예술가’로서 이하응을 섬세한 솜씨로 되살려놓는다. 이하응은 정치가였을 뿐 아니라, 조선 말기의 대표적 서화가요, 가야금에도 능했던 예술가였다. 추사로부터 서화를 배운 이하응은 조선의 대표적 문인화가로 꼽힐 만큼 서화의 대가였으며, 특히 그의 호를 따서 ‘석파란’이라고 불리는 난 그림은 중국 사람들이 탐을 냈을 정도로 유명하다. 누구보다 문인화에 능했고, 또 그림에 스스로 미쳐 있었던 화가 이하응. 작가 류서재는 이 ‘석파란’의 화가 이하응에 주목하여 그의 서화에 대한 열정과 탐미를 새로운 각도에서 펼쳐 보인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단지 이하응의 ‘탐미’만을 맹목적으로 좇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석파란’이라는 작은 화폭 안에 풍운아 이하응의 파란만장한 정치적 삶과 고뇌를 난을 치듯 절묘한 솜씨로 그려 넣는다. 『석파란 』은 석파 이하응의 붓끝을 좇아 그려나간 한 장의 문인화이자 그 필치를 통해 생의 파란과 고뇌를 읽어내고 있는 한 편의 서사시이다.우선, 추사가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대가가 없다”라고 극찬했다는 흥선대원군의 묵란을 들여다보자. 이하응의 묵란의 독보성은 그와 쌍벽을 이룬 운미 민영익의 비교적 담백함이나 추사의 고고함에 비해 ‘거친 풍파와 고고함’을 동시에 담고 있는 것으로 얘기된다. 투박하고 굵게 표현된 거친 바위 위에 여러 갈래로 뻗은 난초는 허공에 끝나는 그 지점까지 역동적인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있다. 직선으로 뻗은 것이 아니라 춤을 추듯 율동감 있게 가느다랗게 뻗은 여러 갈래의 난 잎. 이 난초의 기기묘묘한 선은 거친 바람과 거기에 노출된 선비의 힘겨운 투쟁과 강직함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바위를 뚫고 피어나는 생의 의지, 그리고 그 척박함에도 불구하고 비할 데 없이 고결한 생동감을 지니고 있는 난초, 이것이 바로 이하응의 ‘석파란’의 본질이고, 또 작가 류서재가 포착하려는 흥선대원군 이야기의 심층이다.『석파란 』에 그려진 ‘바위’, 즉 역경의 시공간은 1862년~1863년 즈음으로 한정된다. 즉 이 작품은 흥선대원군의 섭정 정치와 그 이후의 외세와 민비와의 정치사적 대결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고종이 조선 26대 왕으로 즉위(1863) 직전 상황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섭정 정치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끝이 난다. 『석파란 』은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통해 세도정치를 분쇄해 왕권을 다시 공고히 하고, 당쟁의 온상인 서원을 철폐하고, 『양전편고 』 등 법전을 편찬해 법질서를 확립하고, 침략적 외세에 맞서는 등 일대 혁신정책을 강력히 추진할 수 있었던 그의 신념과 이상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었는지를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석파란 』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하응의 운명과 예술혼과의 관계인데, 이는 작가가 이하응의 ‘석파란’이 그의 둘째 아들이 고종이 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근본적이다. 이 작품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조대비(효종세자 익종비), 실제로 철종 사후 이하응의 둘째 아들을 왕으로 추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궁중 최고 어른 조대비가 이하응과 연결되는 계기는 ‘묵란화’이다. 헌종의 어머니 조대비는 시어머니인 순원왕후의 그늘에 가려 철종 대까지 권력의 외곽에 있었던 여인이다. 남달리 예술에 조예가 깊어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조카 조성하의 집을 방문했다가 한 폭의 묵란화를 보게 된다. 그 그림에서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유아독존의 기품을 발견한 조대비는 조성하에게 “이 묵란의 주인이 누구냐”라고 묻고, 기녀의 그림으로만 알고 있던 그 그림의 진짜 주인이 이하응을 만남으로써 ‘왕위계승’을 성사시키게 만든다. 이러한 설정은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석파란 』의 작가가 이하응의 예술을 핵심적인 위치에 놓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소설의 내용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당대 사회와 흥선대원군의 상황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주지하다시피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헌종비인 대왕대비는 강화도령 철종에게 왕위를 잇게 하고 근친인 김문근의 딸을 철종비로 맞게 함으로써 안동 김씨가 세도를 잡도록 하였다. 안동 김씨의 세도 아래 삼정은 더욱 문란해지고 탐관오리가 횡행했으며, 당쟁과 파벌의 온상인 서원의 횡포는 더욱 심했다.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지게 되자, 마침내 농민들은 1862년 봄 진주민란을 일으키고 지배층의 착취에 맞서 1860년 최제우는 동학을 창시한다. 어렸을 때 부모를 여읜 뒤 사고무친으로 불우한 청년기를 보낸 낙박 왕손 이하응은 시정잡배와 어울리며 파락호로 전락하고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궁도령, 상갓집 개’라 불리며 구걸도 서슴지 않는다. 양반을 상대로 그림을 팔아가며 근근이 살던 이하응은 조대비와의 만남을 통해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무소불위의 섭정 정치를 편다. 권력을 쥐자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경복궁을 중건한 등 쇠락한 왕실의 힘을 되찾았으며, 서원 철폐, 법전 정비, 쇄국 정치 등 과감한 개혁 정치를 시행한다.『석파란 』의 시대적 배경인 1863년의 상황에서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세도에 눌려 여전히 저잣거리를 누비면서도 오랜 친구인 김병학과 교류를 하고 있었으며, 한편 묵란에 열중하고 있었던 것으로 그려진다. 『석파란 』은 1863년 고종 즉위 이후 흥선대원군의 개혁과 쇄국 정책의 사상적 기원을 보여주고 있는데, 작가가 주목하고 있는 지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정치적 드라이브는 ‘석파란’에 나타난 그의 높은 예술적, 사회적 이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하응은 붓을 잡았다. 공자가 살아있다면 공자에게 길을 묻고 싶었다. 먹물과 치욕이 차갑게 뒤섞이고 있었다. 날숨이 뿌연 안개로, 뿌연 안개가 종이의 여백으로 바뀌는 순간은 알 수 없는 시간 속이었다. 높은 산 깊은 계곡처럼 꿈이 높은 사람은 현실에 깊이 절망하는 법이었다. 꿈은 아름다운 허상이며 바위처럼 각박한 현실에서 피어나는 것. 흙 한 줌 없는 척박한 바위. 그곳에서의 완벽한 개화.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그래야했다. 바위 위에서 뼈와 같은 뿌리들을 뻗는 난초처럼. 거침없는 허공에서 난초는 피어나고 난초의 뿌리가 바위를 감싸면서 결국에는 바위를 깨리라. 그것이 나 이하응의 석파란이다. 이하응은 먹물이 지나는 길을 노려보았다. 허공과 난엽과 바위가 어우러진 절묘한 각도였다. 이하응은 달빛이 들어올 때까지 석파란을 들여다보며 내내 앉아있었다.
윗글은 석파란을 그리는 이하응의 심경을 통해 곧 자신의 불운한 운명과 조선의 혼란을 뚫고 자신의 이상을 세우고자 하는 영웅적 개인과 위정자의 의지를 보여준다. 석파란에 미쳤다는 것은 곧, 그의 이상을 끊임없이 되새기는 것이다. 따라서 묵란이란 이하응에게 도피가 아니라 실천으로 통하는 고된 연마를 의미한다. 그는 김병학과 서원 문제를 놓고 논하는 자리에서 공자의 ‘완전한 도덕 정치’를 언급하는데, 김병학이 “어디가 불안하고 어디가 불완전하다는 말인가. 멋대로 말하지 말게. 정치가 묵란인 줄 아는가”라고 반박하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정치도 묵란이네. 헛된 줄을 알면서도 절대로 놓을 수 없는 그 이상이란 놈을 말일세.” 이하응에게 묵란, 특히 석파란이란 곧 이상이자 정치, 더 나아가 공자의 완전한 도덕 정치이고 그것이 이하응이 꿈꾸는 조선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서원 철폐에 대해 유생들과 대신들이 항의하자 흥선대원군은 “내가 조선의 법이다”라고 외친다. 이 장면은 “조선이라는 꽃. 그 꽃은 옹기 속에서 간신히 숨을 쉬며 어디로 팔려 갈지도 모르는 운명 속에서 살았다. 나는 햇빛 속으로 나온 꽃을 보호하기 위해 들판을 지킬 것이다. 이제부터 쇄국이다.”라는 다짐과 겹치면서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책 추진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꿈에서 흥선대원군이 도원을 묻는 안평대군에게 가장 완벽하나 스러질 뿐인 아름다움인 ‘꽃’으로 화답했듯, 조선의 미래에 대한 이하응의 이상의 실현을 뜻하는 것이다.‘석파란’이 곧 흥선대원군의 조선을 통해 피우고자 하는 국가의 이상이자 도원이고, 그 실현 의지에 대한 선언이라면 그 내용은 무엇인가. 『석파란 』은 흥선대원군의 ‘석파란’에 어떤 빛깔이 담겨 있는지를 역사 이면의 허구를 통해 포착해나가고 있다. 『석파란 』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흥선대원군의 비전이 종교가 아니라 국가를 향해 있다는 것, 또한 그 국가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조선의 근간인 성리학을 바로 세워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법치주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당대 사회 혼란 속에서 새롭게 대두하고 있는 서학(천주교)나 동학에 대해 흥선대원군은 명확한 반대 입장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사상 형성은 다음과 같은 작가의 시선을 통해 지지를 얻는다.주지하다시피, 흥선대원군의 실제적인 개혁 사상은 지배층이 아니라 민중의 삶을 체험함으로써 형성된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세도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서원을 확장하는 것을 일상 속에서 체험하고 이를 비판한다. 작가는 이를 ‘불만 서원’의 이야기를 통해 묘사하고 있다. 경주에서 들린 ‘불만 서원’이라는 곳은 지방 양반가를 확장한 것으로 진정한 서원에 값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남녀노소 모집’이라는 간판을 내걸어놓고 처녀를 모집해서 부역을 시키고 또 ‘원칙’이 아닌 ‘타협’을 가르치는 곳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정책은 바로 이러한 현실체험에서 비롯된 것이고, 때문에 그것은 병든 조선 사회에 대한 올바른 처방일 수 있었다는 것을 작가는 묘파하고 있는 것이다.한편 흥선대원군이 조선 왕실을 중건하고 쇄국 정책으로 나아가게 된 배경에는 동학과 서학에 대한 깊은 사유와 체험이 놓여 있다는 것을 작가는 강조하고 있다. 작가는 이하응이 천주학이라는 서양 근대보다는 ‘동학’에 기울어져 있음을 암시하는데, 이는 이하응과 최제우의 만남을 통해 제시된다. 이하응은 우연히 자신의 집에 뛰어들어 죽은 동학 접주 ‘최갑수’에게서 ‘후천개벽’이라는 말을 듣고 경주의 구미산으로 내려간다. 구미산의 산자락에서 맥문동을 본 이하응은 진정한 의미의 ‘꽃’인 동학 교주 최제우를 만나 독대하게 된다. 바둑을 두면서 자살 수를 두어 전체를 살리는 최제우의 바둑에 놀라고, 또 한편 ‘오심즉여심’이라는 평등과 상생의 동학사상을 듣게 된 이하응은 동학이 단순히 사교가 아니라 고통받는 민중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된다.최제우에게서 “정치의 본질은 백성에게 다만 정성을 다하는 겁니다. 사람이 사람을 다스린다는 것은 옳지 않을뿐더러 또한 사람에게 정직하지 않고서는 어찌 정치를 하겠습니까.”라는 간곡한 조언을 들은 이하응은 최제우를 난세의 꽃으로 여기며 그의 뜻을 받아들이게 된다. 역사적 사실과 무관한 가상의 만남을 통해 작가는 동학사상과 교감하는 흥선대원군을 보여주는데,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그러했듯 흥선대원군이 동학을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작가는 흥선대원군이 당대 조선 사회에 들이닥친 동학과 서학에서 무엇을 읽고 또 이를 통해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강고히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흥선대원군은 아내 민씨 부인과 유모(박 마르타)를 통해 천주학(서학)의 사상을 접하게 되는데, 서학의 인간 평등과 인간 존엄 사상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하지만 그것은 반상의 법도에 어긋날 뿐 아니라 여전히 이분법적 논리라고 생각한다. 즉, “서학이 만민평등을 주장하나 그 속에는 하느님이라는 절대 관념 아래 사람이 순명하라는 율법이 있으니 그것도 지배와 피지배의 이분법적 논리다. 서학의 율법이 지키기에 더 까다로운데 백성들이 그걸 모르는구나. 백성이 성리학을 양반처럼 적으로만 바라보아서 그렇다.”라고 논평하고 동학이나 서학이라는 “종교는 변혁을 이루는 징검다리일 뿐 그것 자체가 신흥국가가 될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단순히 그가 동학과 서학을 배격하고 성리학의 세계로 복귀한 것은 아니다. 다음과 같은 흥선대원군의 고뇌는 그의 개혁과 쇄국이 어떤 곤경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백성들은 동학과 서학으로 또 갈라졌다. 양편의 백성들이 모두 성리학을 공격하는 것이라면 성리학이 무너지는 자리에 서학이 치고 들어올 것인가, 동학이 치고 들어올 것인가. 오백 년 이 씨 왕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세상이 온다 해도 백성들은 그들이 원하는 지상천국을 이룰 것인가.이하응은 삼각형의 꼭지 성리학을 내려놓았다. 동학을 한편으로 두고 서학을 상대편으로 둔다면 결국에는 조선의 정체성 싸움이었다. 허면 어느 쪽이 더 많이 조선의 백성을 끌어들일 것인가. 성리학이 한편이고 동학이 상대편이라면 내란이 일어날 것이었다. 성리학이 한편이고 서학이 상대편이라면 국제 전쟁이 일어날 것이었다. 성리학은 어느 편과도 전쟁을 해야 하고 성리학이 무너지면 새로운 세상이 온다.
윗글에서 이하응은 두 개의 지점, 즉 조선의 유교 질서가 무너지고 근대의 평등사회가 도래하는 지점과 조선 사회가 서구화되는 두 지점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이 지점은 사실 구한말 조선이 놓여 있던 문제적 지점이자 과도기적 지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흥선대원군은 두 개의 필연적 붕괴를 늦추기 위해 성리학의 근간을 다시 바로잡는데 이들 종교 사상의 일부를 수용한다. 지배층의 횡포를 중지하고 백성을 덕치로 다스림으로써 파탄에 이른 유교 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그는 “조선의 위정자들은 백성들의 배신을 탓하지 말고 성리학적 가치관을 재정비해야 한다. 법을 합리적으로 실행해야 백성들이 따를 것이다”라고 귀결 짓고 성리학적 이데올로기를 통한 조선의 재건을 실행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바위를 뚫고 고고하게 피어난 ‘석파란’이란 붕괴되어 가는 성리학 이념과 시대의 변화 속에 다시 한번 태평성대의 꿈을 펼친 이하응의 필사의 묵란화이자 근대로 넘어가기 직전에 타오른 유교 국가 조선의 마지막 불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석파란 』은 동학 교주 최제우를 비롯하여 개화파 김옥균, 민비 등 실제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대체로 이들이 나오는 장면은 작가의 상상력에 기댄 바가 크다. 1863년 김옥균이 김병학의 집에서 서양 춤을 배우고 어린 민비, 즉 민자영이 김옥균의 자유당 모임에 참가하여 논쟁을 하는 장면은 다소 과잉이라는 느낌을 주는데 왜냐하면 1851년생인 이들이 12살의 나이로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을 읽고 일본에 다녀오고 또 동학과 서학 사상에 대해 논쟁을 한다는 것은 다소 무리한 설정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파란’이라는 묵란을 통해 흥선대원군의 이념과 의지를 핵을 포착하고 있는 솜씨와 문제의식은 역사소설로서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서지정보>
ISBN: 9791197171512
발행일: 2022년 09월 14일
쪽수: 570p
판형: 148*211*32mm / 870g
석파란 (개정판) / 류서재 장편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