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 입을 털어내는 / 김경현

언 입을 털어내는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이 빛나고 있었다. 구름은 거품처럼 둥둥 떠다녔다. ‘이렇게 오래 하늘을 올려다본 건 오랜만이네.’ 처음 별자리 책을 샀던 때는 주변에 높은 건물이 많지 않아서 밤하늘에 별이 빼곡했다. 별이 빛나는 밤이면 별을 보며 밤길을 걸었다던 옛사람들이 어렴풋이 이해됐다. 굽은 길을 걸어가며 노래하는 사람들. 바람이 불고 들판에 가득한 잎이 내는 소리. 두려움을 이겨내려 언 입을 털어내는 용기. 집 앞에는 너른 논과 밭이 있었다. 창밖을 보면 오른편에 동갑내기 동네 친구네 아빠가 하는 교회가 있었다. 밤이면 붉은 십자가가 빛났다. 언젠가 어떤 날.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자, 소원을 빌었다. 동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에 나왔다. 코끝이 쨍한 어느 겨울날. 외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어머니와 동생이 있는 병원으로 갔다. 상황만 기억날 뿐, 정확한 장면은 떠오르지 않는데 날씨가 추워지면 문득문득 떠오른다. 달무리가 지면 “비가 오려나 보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건 어머니가 외할머니 입버릇을 전해준 탓이다. ‘소가 먹는 풀은 사람도 먹을 수 있다’라거나 ‘지네는 쌍으로 다닌다’라는 도시에서 자란 이들은 알기 어려운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그리고 ‘미꾸라지가 뱀이 되고 뱀이 이무기가 되며 이무기가 용이 된다’처럼 포켓몬스터 진화 같은 이야기를 해주기도 하고 ‘비가 오면 물고기가 하늘을 난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비가 쏟아지면 종종 길에서 헤엄치는 미꾸라지를 보긴 했다. 손으로 잡아 어항에 담아 놓으면 “거봐라, 내 말이 맞지?”라며 원인과 결과를 본인 말에 맞춰 말하곤 했는데 그건 이모들도 비슷했다. “마당에 쿵 하는 소리가 들려서 문풍지 틈으로 밖을 보았더니 호랑이가 있었어. 호랑이 등에 길고 하얀 수염이 있는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는데 또 쿵 하더니 날아가 버렸어.” 큰이모는 믿지 못하는 내 표정을 보며 답답해했다. 답답할 때면 뚫어져라 하늘을 본다. 시력이 나빠진 탓에 눈을 찌푸려야 초점이 맞춰진다. 퍼져 보이던 빛이 세세하게 보이고, 뿌옇던 달도 또렷하게 보인다. 꾸겼던 표정을 풀고 하늘을 본다. ‘어릴 때는 알았는데......’ 별자리를 눈으로 잇다가 고개를 떨군다. 아직 입김이 나오지 않는 추위지만 사람들은 어느샌가 몸을 움츠리고 걷는다. 곧 눈이 내리고 길이 얼어붙으면 넘어지지 않으려 천천히 걸을 것이다. 이 동네는 젊은 사람이 모두 일하러 나가서 눈이 내려도 쓸 사람이 많지 않다. 골목길 곳곳이 얼어붙기 전에 쓸어야 미끄러워지지 않는데 해 뜰 무렵 부지런한 노인들이 눈을 쓸어놓는다. 재작년 겨울에는 남는 나무로 넉가래를 만들어 먼저 쓸어 두었는데 눈을 쓸어놓은 기특함보다 넉가래에 더 관심 있는 눈치다. “좋은 게 있네”라며 내 손에서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올해도 비슷한 일이 더러 벌어질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책방 문을 열지 않는다. 문밖에서 구경하고 문밖에서만 인사한다. “책이 팔리느냐”라거나 “잘되어야 할 텐데” 정도만 관심을 가질 뿐. 건물주 할머니는 ‘이 동네 사람들 다 이상해. 뒤에서 욕이나 하고 시끄럽고 쓰레기나 막 버리지’라며 고개를 저었지만, 그런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어서 귀담아듣지 않았다. 사람들 목소리가 크게 들리는 건 그만큼 두렵거나 걱정이 많은 탓이다. 이겨내려는 것뿐이다.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도, 하늘이나 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어쩌면 다 뭔가를 이겨내려는 행위일지 모른다. 그렇게 보면 무너지지 않으려는 그 모습들은 무척 아름답다. 뇌리에 깊게 박히는 건 악다구니겠지만 그보다 오래 남는 건 작은 용기가 주는 온기다. 끝없는 길이 이어진 밤, 동장군에 한없이 작아지는 겨울. 작은 별빛에 기대어 걷는 사람들. 이야기꾼이 되어 시름을 잊는 사람들. 삶을 노래하는 사람들. 나이가 들수록 말보다 노래가 는다. 인간관계를 맺고 이어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짧은 시간에 상대방을 이해할 수도 나 자신을 이해받을 수도 없는데, 관계란 꼭 그래야만 한다는 것처럼 답답해한다. 이해나 공감, 동감 같은 말이 쉽게 쓰인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습관, 취미부터 그 사람이 어떤 것을 사랑하고 미워하는지 알기 전에 빨리 알아채려 한다. 관계에도 효율과 비효율이란 말이 끼어든다. 그렇게 보면 노래는 효율적이지도, 비효율적이지도 않다. 못 부르더라도 제멋에 취하면 그만이고 잘 부르면 잘 부르는 데로 부르는 맛, 듣는 맛이 있다. 어른들은 그걸 먼저 알아서 그렇게 슬퍼도 그렇게 기뻐도 노래를 불렀는가. 생각해 보니 그때 내 아버지가 부른 그 노래는 슬픈 노래였구나. 그때 내 어머니가 부른 노래는 기쁜 노래였구나. 외할머니 꽃상여가 산을 오를 때 상여꾼이 부른 그 노래는 대신 울어준 것이구나. 삶을 단어로 배우면 아는 것만으로 세상을 단정한다. 결국 생각하는 폭이 좁아지고 상대방을 이해하려 들지 않게 되어 공감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 또한 어떤 면에서 상처받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겠지만, 또 한 편으로는 그만큼 가능성을 놓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알면서도 애써 두려워하고 짐짓 기대하는 모순. 그렇게 찾아낸 차선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위선, 누군가에게는 위악, 누군가에게는 차악이나 최악일 뿐인. 각자 꿈꾸는 최선은 굽은 길 끝에 있다. 너른 논과 밭 너머에 있고, 달무리 건너에 있다. 답답함이 지나야 만날 수 있고, 구겼던 표정을 풀어야 느낄 수 있다. 봄이 오고 땅이 녹아야 각자 최선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장 추운 겨울이 될 거라는 기상예보가 틀려서 ‘올해 겨울은 참 이상했어’라는 말이 두런두런 나오거나, 부지런한 노인과 넉가래가 한참 눈을 쓸고 나서야 우리는 최선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명절마다 술에 취해 책방 문을 열고 말을 거는 동네 아저씨가 딸에게 책 한 권을 선물하는 날이 오면. 매일 밤 남편이 그립다며 우는 옆집 아줌마 통곡이 노래처럼 들리는 날이 오면. 미꾸라지가 뱀이 되고 뱀이 이무기가 되며 이무기가 용이 되면. 길고 하얀 수염이 난 할아버지가 호랑이와 춤을 추며 두근두근쿵쿵을 부르면. 별빛만큼 시간이 쌓여서 괴로움도 슬픔도 사라지면. 누구에게나 최선인 그날이 오면. 노래해야지. 해마다 이즈음 플레이리스트에 넣어두는 머라이어 캐리, 야마시타 타츠로처럼. 올해는 너무 힘들었으니까 나에게 칭찬도 해주고, 선물도 주고. 다시 삶을 사는 마음으로 하나씩 쌓아가야겠다. 어둡고 추운 겨울이지만, 하늘을 올려다보면, 별이 빛나고. 굽은 길을 걸어가며 노래하는 사람들. 바람이 불고 들판에 가득한 잎이 내는 소리. 두려움을 이겨내려 언 입을 털어내는 용기. 다시, 그 용기. 김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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