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 온 라이트 오프 (Light-Off)조명이 꺼진다.무대 위에서의 순간들은 대체로 분절되어있다. 명과 암을 넘나드는 불빛 사이로 공연장의 구석구석, 관객들의 표정, 옆에 선 멤버들의 실루엣이 산란하게 지난다. 파편의 와중에 일정하게 이어지는 건 연주뿐이다. 고쳐 말하면 이어져야 하는 것은 연주뿐이다. 라이브 공연에는 유보의 기회가 없다. 관객들이 작은 낌새에도 즉각 반응하기 때문이다. 본공연 직전 잠깐의 암전에 흩어져있던 시선들이 일제히 무대를 향할 때부터 공연은 시작된다. 거기서부터는 도망칠 수 없다. 도망치고 싶지 않다.도망치고 싶지 않다. 아나하*가 내게 준 것 중 첫 번째.원 (start)시작은 호기심과, 영등포의 굽이치는 환승 통로. 멤버들에게도 이야기한 적 없는 내 첫 합주의 기억은 첫 기절 위기와 나란히 저장돼있다.*밴드 아나하(@a.na.ha_)꾸준히 음악을 좋아했고 악기를 다뤄왔지만, 밴드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은 고3이 되어서야 처음 했다. 가장 먼저 다룬 악기가 혼자로도 충분한 피아노여서 였을지 오랫동안 혼자서, 많아도 둘이서 연주를 해왔다. 대학 입시 기간 밴드 음악에 본격적으로 꽂히면서부터 궁금증이 생겼다. 정말 백킹 트랙 없이도 합을 맞춰 연주하는 게 가능하다고?그 무렵 눈에 들어온 게 베이스였다. 정직한 악기 같았다. 성인이 되자마자 모아뒀던 돈으로 스콰이어 베이스를 샀다. 예상을 웃도는 길이와 무게에 당황하며 줄을 퉁겨보다 직감했다. 독학으로는 자세 망치기 쉬울 것 같다.초보자 환영, 일단 지원하면 가르쳐드립니다. 배우면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학교 밴드 면접을 보러 갔다가 왕복 세 시간 통학 거리와 전무한 베이스 경력만 들키고 대차게 떨어졌다. 레슨을 구했다. 운을 여기에 다 쓰려고 그랬던 건지 마음 맞는 베이시스트 선생님과 연이 닿았다. 연습을 이어 나가는 중간중간 들어갈 만한 밴드를 물색했다. 기왕 시작한 거 기수나 소속 제한이 있는 곳은 피하고 싶었다. 학교 밖으로 눈을 돌리면서 아나하 영상을 처음 봤다. 가장 마음이 갔지만 이미 풀 세션, 베이시스트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다 레슨 6개월 무렵 아나하 베이시스트 모집 공고가 떴다. 지원 영상만 내리 4시간을 촬영해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같이 해봅시다!첫 합주날 내 목표는 베이스 앰프 똑바로 찾기였다. 언뜻 비슷하게 생긴 일렉기타와 베이스 앰프의 차이를 가려내려고 열심히 예습해갔다. 합주실에 도착하자마자 일렉기타 앰프로 뚜벅뚜벅 걸어가다가 제지를 당했다. 민망하고 웃겨서 순간 긴장이 풀렸다.갑자기 풀린 게 문제였다. 빠듯한 일정으로 좋지 않았던 몸 상태에, 종일 등에 이고 다닌 베이스의 무게, 합주에 대한 오만가지 생각이 겹쳐있다가 한꺼번에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즉석 몸살… 그런 게 있다면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흐려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고 합주를 마쳤다. 소회를 나눌 새 없이 무어라 무어라 인사를 건네고 집으로 향했다. 영등포구청역 환승 통로를 걸으며 최초로 기절이라는 걸 해볼 것 같단 예감이 들었다. 스크린도어 뒤로 빈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도착역까지 구석에 머리를 대고 서서 비틀거리며 버텼다. 어찌저찌 집에 도착해 베이스를 내려놓고 침대에 누웠다.합주가 되는구나.그렇게 생각하고 까무룩 잠들었다.투 (to-too)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밴드가 낭만적으로 비춰지는 것에 비해 얼마나 현실적인 요건들로 구성돼있는지 알 수 있었다. 몇 차례 공연과 촬영을 준비하며 실감한 밴드의 본질은 약속이었다. 합주 일시, 합주곡, 공연 컨셉, 착장, 인트로, 멘트, 정산 방식, 곡의 키와 빠르기… 공연 외의 이야기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쪽을 택할지 어디로 나아갈지 결정하는 모든 과정이 약속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약속의 피상만으로 밴드가 지속되는 것은 아니었다.약속과 약속 사이 숱한 고백, 눈물, 격려, 분노. 서로의 앞에서 줄곧 벅차게 엎지를 수 있었던 건 우리 모두 쏟아진 마음 앞에 한달음, 와중에 닦아 주려 뭐라도 챙겨 들고서 달려오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고개를 들면 나를 가장 많이 웃게 하는 얼굴. 또 울게 하는 얼굴. 약속 뒤에 놓인 이의 표정은 그 약속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렇구나. 이곳은 약속과 전염의 공동체. 때마다 지키고 싶은 게 늘었다.이 노래를 같이 듣고 싶었어. 그러면 들었다. 아무리 길어도 아무리 몰라도 끝까지 들었다. 아주 많은 말이 오가거나 거의 아무 말도 오가지 않는 시간이 차곡히 쌓였다. 그사이 나는 발로 박자 세기를 멈추고 드럼의 박자만 믿으며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쓰리 (three), 포 (for)하지만 아무리 진한 약속이라 해도, 약속은 피할 수 없이 시기적이고 부분적이다. 우리는 약속에게 영속성을 기대할 수는 있어도 그에게서 당장 답변을 얻어낼 수는 없다. 다른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밴드의 존속은 어려운 일이며 완전체라는 개념은 더 그렇다. 처음과 중간이 한창이어도 끝이 수시로 끼어들 수 있다. 하나의 밴드를 여러 사람이 거쳐 간다.이것을 인정한다 해도 나는 저 냉정한 세 단계, 처음-중간-끝이 부정확을 넘어 부정하게 느껴진다. 그건 꼭 더하고 빼면 0이 된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전과 후의 개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 분명히 설핏 달라져있는 시간을. 조금 더 정확하게 정의하고 싶다.‘전과 후’와 ‘이전과 이후’의 차이는, 후자는 기준이 되는 때를 포함한다는 데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가 기준이 된다.그렇다면 ‘이’는 사이보다 크다. ‘이’는 분명히 있다. 나는 ‘이’와 안 해본 놀이가 없을 때까지 어울리기 위해 아나하에 있다. ‘이’를 간지럽히고 싶다. 접었다 펴고 싶다. 던지고 받고 싶다. 새로운 놀이를 발명하고 싶다. 놀이가 동나면, 실은, ‘이’를 한계까지 늘여 저 너머로 던져두고 그 끝은 모르는 체하고 싶다. 하지만 마지막 문장은 내 것이 아니다.대신에 나는 ‘이’를 똑바로 보기로 한다.혜화 지하의 쿰쿰한 냄새와 새벽 합주, 홍대의 요구르트, 충정로의 어김없는 티타임, 온갖 농담과 장난, 돈까스와 칼국수, 거울 같던 미간, 001의 리허설, FF의 뜨거운 조명과 더한 환호1, 강릉의 바다와 소나기, 파주의 박물관, 이브에서 크리스마스로 향하던 밤의 광장시장과 청계천, 카메라와 눈이 마주치면 흠칫거리던 첫 촬영2, 보는 내내 할 말을 잃어서 몇 주간 할 말이 너무 많았던 공연, 선명한 자국의 펜타포트 불바다3, 여름 운동장에서의 Sigur Ros.1 올해 8월 홍대 FF클럽에서 진행한 연합공연의 “아나하 - Tick Tick Boom (cover. The Hives)” 2 이브와 크리스마스의 모습이 담겨있는 첫 스튜디오 커버 영상 “아나하 -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 ( MCR. ver )” 3 펜타포트에서의 순간들이 녹아있는 커버 영상 “아나하 - Speaking (cover. Mrs. Green Apple )” 자정의 통화, 빼곡한 메모장, 한발 늦은 포옹, 종점까지 짓무르던 눈. 그런 것들까지도. 더 자주, 더 곧장 받아적어서 ‘이’의 현재를 따라잡기로 한다. 연주에서만큼이나 관계에서도 유보가 위험하다는 것을 이곳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이 경유가 아니라 관통의 방식으로 나와 우리를 거쳐 가고 있다.카운트 오프 (Count-Off)무대에 오르면 무슨 생각을 하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그냥 믿는다. 무대 아래에서의 시간이 만든 우리의 맥락에 기댄다. 우리가 알고 우리는 아는 그것. 수없이 합을 맞춘 바로 그 박자에 긴장과 이완의 호흡으로 움직이는 손을, 내가 아는 가장 커다란 뒷모습을, 본다. 간혹 눈이 마주치면 알게 된다. 지금 당신에게로 옮겨갔다고. 우리 서로를 가로지르고 있다고.다시 처음,암전 속 드럼의 카운트 오프(예비박)는 약속의 재생 신호.머릿속 메트로놈을 끄고 너를 믿는다.내가 아니라, 나를 믿는 너를 믿는다.원, 투, 쓰리, 포.조명이 켜진다.서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