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샤튜더 할머니께 부치는 반성문 타샤 할머니 안녕하세요. 할머니는 제가 누군지 모르실 테니 간략하게 제 소개를 할게요. 저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20년쯤 전부터, 할머니가 그린 그림들을 너무나도 싫어했던 사람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할머니가 그린 그림들은, 정말이지, 굉장히, 매우 촌스러운 그림이라고 여겼던 사람이지요.물론 할머니만의 그다지 정교하지 못하고 약간의 엉성한 형태감과 투박한 선의 느낌은 제 스타일 이었습니다. 아. 이건 조롱하는 게 아니라 진짜 좋아했다는 거예요. 유독 그림에 있어서 정확하고 사실적인 형태를 그려내는 것이 뭔가 대단한 거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저는, 정말이지, 굉장히, 매우 바보 같다고 여기거든요. 할머니도 제가 뭔 말하는 건지 대충 아실 거로 생각해요.어쨌든 엉성하고 투박한 그림체를 좋아하는 저이지만 타샤 할머니가 그린 그림에는 별로 감흥이 없었어요. (전혀 다른 투박한 느낌이어도) 영화감독 팀 버튼이 그린 그림이나 낙서 화가 바스키아 그림을 좋아했죠. 근데,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당시에 제 나이가 십대 후반이었거나 아니면 갓 십대를 넘겼거나 했을 텐데. 솔직히 그 나이대의 시선으론 타샤 할머니가 그렸던 정원에서 피어난 꽃이나 풀에서 뛰어노는 토끼 따위 그림들은, 당연히, 아주 당연히 힙해보이지 않았겠죠! 안 그래요? 뭔가 그로테스크한 느낌의 팀 버튼 그림이, 뭔가 난해하지만 자유로운 느낌의 바스키아 그림이 훨씬 힙해보였겠죠! 안 그래요? 헤헤~ 제가요. 그 이후로도 전시회를 정말 많이 다녔거든요. 할머니는 모르시겠지만, 한국에 인사동이라는 곳이 있는데 인사동 거리에는 작은 갤러리들이 많아요. 대부분 입장료도 무료라 자유롭게 이런저런 전시를 볼 수 있어요. 다만, 너무 큰 기대를 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오랜 기간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들의 퀄리티 높은 전시도 열리긴 하는데요. 화실 같은 데에서 이제 막 배운 어르신들끼리 모여서 각자 회비를 걷어 갤러리를 대관해서 진행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조악한 전시회도 정말 많거든요. 아 근데. 화실에서 그림 배우는 어르신들의 열정을 비하하는 건 아니에요. 저는 그저, 그 조악한 느낌의 단체전시들이 별로라는 거예요. 저는 대학 졸전 느낌이 드는 단체 전시도 끔찍이 싫어하거든요. 아무튼요. 오랜 기간 인사동 갤러리로 자주 놀러 다니다 보니, 어느 순간 대충 작품만 봐도 작가의 나이대를 맞출 수 있겠더라고요. 구상화 작품에선 인물 중심의 작업은 영 아티스트일 확률이 높고, 정물이나 풍경을 담은 작업은 올드 아티스트일 확률이 높더군요. 추상화 작품에서는 채도가 낮은 작업은 영 아티스트일 확률이, 반대로 채도가 높은 작업은 올드 아티스트일 확률이 높더군요. 근데 아시죠? 다 그런 건 아니라는 걸. 정작 타샤 할머니도 올드 아티스트임에도 인물 중심의 그림과 채도 낮은 색들을 많이 쓴다는 걸 저도 알고는 있어요. 강조할게요. 저는요. 그렇게 바보같이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사람은 아니랍니다. (찡긋) 하지만, 제가 전시회만 놀러 다닌 짬밥으로만 얘기하는 건 아니에요. 제가 꽤 오랜 기간 성인들 대상으로 그림을 가르쳤지만, 제게 찾아오는 수강생들 또한 나이대에 따라 그리고 싶어 하는 그림 스타일이 갈리는데요. 인사동 전시에서 작가의 나이대별 작품 특징들과 분명 교집합 하는 지점이 있다는 거예요. 나이가 어린 수강생일수록 인물 그리는 걸 좋아하는 경향. 나이가 있는 수강생일수록 사람보다 정물이나 풍경 그리는 걸 좋아하는 경향. 나이가 어릴수록 내 생각이나, 내가 느끼는 감정과 같이 시선이 자기 안으로 들어가는 경향이 있고, 나이가 들수록 나를 둘러싼 여타 많은 것들로 시선이 안쪽에서 밖으로 뻗어 나가는 경향이 있더군요. 그런데 말이죠. 전 지금껏 살면서 무엇이든지 간에 정형화되는 걸 극도로 싫어했어요. 제가 말했잖아요. 사람들이 유독 그림에 있어서 정확하고 사실적인 형태를 그려내는 것이 뭔가 대단한 거라고 여기는 게 바보 같다고. 그래서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이 잘 그린 그림이고, 만약 자기가 사실적으로 그림을 그리지 못하면 스스로의 그림 실력을 부끄러워하죠. 이렇듯 그림을 대하는 정형화된 사고에서부터 시작해서, 유독 한국 사회에 퍼져있는 ‘이 나이대엔 이걸 해야 하고 저 나이댄 저걸 해야 하고, 남들도 다 저렇게 사니깐 나도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등의 정형화된 사고들까지. 어찌 보면 제 삶은 이러한 정형화된 것들에 탈피하거나 끊임없이 저항하며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그래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죠. 어떤 꼴이냐고요? 알아서 해석하세요. 하하하. 다시 돌아와서, 저는 어렸을 적부터 다짐했어요. 내가 나이를 먹어도, 나는 절대, 내가 그간 봐왔던 나이 든 사람들처럼, 인물이 아닌 정물과 풍경 따위를 채도 높은 밝고 따뜻한 색채로 그려내는, 그런 올드 아티스트들의 전형적인 작업 방식을 따르지 않을 거라고요. 정말 정말 다짐했어요. 그 다짐의 크기가 얼마나 커다랬는지 알려드리고자 지금부터 좀 과하게 표현할 테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러니깐 전 나이 먹어도 절대로, 시골 자연 풍경이나 그리는 틀딱 냄새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았어요. 타샤 할머니처럼 시골에서 정원이나 가꾸면서 1년 12달, 시기마다 피어나는 꽃과 나무, 풍경에 대한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소소하고 소박한 삶을 찬미하는 듯한 그 따위 그림들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하찮으리만큼 평범하고, 너무나도 상투적인 이야기라, 마치 공중화장실 변기 앞에 붙은 화분 그림에 캘리그라피로 ‘행복은 가까이에 있다,’ 라고 쓰여있는 것을 보았을 때 느껴지는, 애처로우리만큼 케케묵은 곰팡이 내 나는 그림이라고 생각했어요. 라고 지난날 이러한 제 생각들이 너무나도 교만하고 오만했다는 것을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습니다. 왜냐? 40대를 앞둔 제가 지금, 일상에서 마주하는 꽃과 나무, 자연 풍경 따위를 드로잉하면서 평온을 찾고 있거든요. (머쓱)얼마 전 누군가가, 타샤 할머니의 책에 관해 얘기하더라고요. 한동안 타샤 할머니 존재를 잊고 살았는데 다시금 떠올랐고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물론 국내에 발간된 할머니 책도 사서 읽어 봤는데 솔직히 재미는 없었어요. 그러나 중간중간 타샤 할머니의 말씀에 담긴 삶을 대하는 태도들이, 진정으로 피부에 와닿기 시작했죠. “요즘 사람들은 너무 정신없이 살아요. 카모마일 차를 마시고 저녁에 현관 앞에 앉아 개똥지빠귀의 고운 노래를 듣는다면 한결 인생을 즐기게 될 텐데.” - 타샤의 정원 中 앞으로 저는 완전히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지금까지 제가 그려왔던 그림의 소재와 그림으로 다룬 주제 의식들은, 이젠 더 이상, 제게 감흥을 주지 못해요. 인물 중심의 그림에도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요. 그러고 보니 나이 든 사람들이 그림을 그릴 때 인물 중심의 그림을 그리지 않는 건, 어쩌면 지금의 저처럼, 사람에게 겪은 감정과 사람에 대한 생각들을 이미 질리도록 해봤기 때문에, 지긋지긋해진 것일 수 있겠다 싶어요.타샤 할머니께, 지난날 할머니가 그린 아름다운 작품을 격하했던 것에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솔직히 이러한 마음들을 숨길 수도 있었지만, 좋든 싫든 인간은 변하고 그 인간 속에 나도 있다는 점,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선 부끄러움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타샤 할머니께 이렇게 반성문을 전합니다. 앞으로는 겸손한 삶의 태도로 더 나은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모르 씀 이모르작가, 크리에이터 더 이상 많은 사람 접하는 게 힘들어서요. 지난 날, 나는 너무 많이 취해있었어요. 향락적이면서도 몽환적인 홍대 근처에서 운영하던 작업실을 정리하고 강서구로 이사 왔습니다. 조용히 그림 그리면서 그림 가르치고 글도 쓰고 그러고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