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 역사문화 탐방로드 - 개화산 청백리길 / 권태운

강서 역사문화 탐방로드능말옛터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이야기 “개화산 정기서린 살기 좋은 능말 옛터!이곳 능말사람들이 수백 년 대대로 살아온 정든 고향이 서울시 방화지구 택지개발로 그 자취가 사라지고 산 좋고 물 좋아 인심도 후했던 이 능말 옛터에 정겨웠던 추억의 아쉬움을 길이 후세에 남긴다.1992년(단기4325년) 10월 17일 능우회” 방화3동 능말이라고 불리는 곳은 느티어린이공원으로 도로명주소는 금낭화로 224 번지이다. 서울의 보호수인 은행나무 한 그루와 느티나무 세 그루가 잘 관리되고 있다. 그래서 바로 옆에 있는 교회 이름도 큰나무교회이다. 큰나무교회 옆에는 국제청소년센터가 있는데 IYC유스호스텔과 IYC스포츠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고려말에 이곳을 왕릉지로 삼았으나 풍수지리가의 만류로 왕릉지라는 표시만 해두었다고 한다. 인조의 생부인 원종(선조의 5자)의 능을 이곳으로 옮기려고 했다가 지금의 김포 풍무리 북성산에 장릉을 조성하였다. <양천읍지>에 정조 임금이 1797년 가을, 장릉을 참배하러 갈 때 양천현아(종해헌)에서 잠시 머물며 남겼다는 한시 한 수가 전한다. 한강 물결을 무명베에, 배다리를 무지개로 멋지게 비유하였다. 또한 가을 들판과 가을 하늘 구름을 대비한 정조대왕의 문학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양천일사(陽川一舍) 정조대왕 한강 가을 물결 무명베 펼쳐놓은 듯,무지개다리 밟고 가니 말발굽 가벼웁다.사방 들녘을 바라보니 황금 구름 색이라양천 고을에서 잠시 군사를 쉬게 하네.江漢秋濤匹練橫(강한추도필연횡)虹橋踏過萬蹄經(홍교답과만제경)爲看四野黃雲色(위간사야황운색)一舍楊川小駐兵(일사양천소주병)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을 몰아내고 이복동생인 진성대군(晉城大君:중종)을 왕으로 추대한 중종반정(1506년)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된 심정(1471~1531) 공이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심씨마을이 되었다. 심정은 조광조 등의 탄핵으로 파직되었으나 남곤, 홍경주 등과 기묘사화(1519년)를 일으켜 사류들을 숙청하고 좌의정까지 올랐다가 김안로의 탄핵으로 유배, 사사되었다.개화산 자락에는 삼정초등학교와 삼정중학교가 나란히 붙어있는데 세 개의 우물이 있었던 마을, 삼정(三井)면에서 유래한 학교 이름이다. 삼각형 모양으로 자리 잡은 세 우물은 한 군데 우물에서 물을 퍼 올리면 다른 우물은 수량이 줄어들어 물길이 같은 우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우물들은 사라졌다. 1994년 개교한 삼정(三井) 초.중학교를 근래에 삼정(三政) 초.중학교로 개명했다고 하니 지역성이 사라진 사례여서 아쉬움이 있다. ​풍산심씨 종택이 개화사가 된 사연 국제청소년센터를 지나 주택가에 절이 하나 있다. 개화산개화사여서 겸재 정선의 그림에 나오는 개화사로 착각할 수 있으나 이곳은 풍산심씨네 99칸 집 종택이었다고 한다. 언제부턴가 <장춘가든>이라는 한정식 식당을 운영하였다. 당시 강서구의 조용하고 경치 좋은 맛집으로 소문이 나서 상견례 장소로도 인기가 많았다. <강서의 역사와 문화>(2010)를 집필한 고 손주영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2000년 전후 99칸집을 문화재로 지정하고자 하였으나 한옥을 개보수하여 가치가 떨어져 승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심씨 후손들이 건물을 매각하지 않았다면 지금은 당연히 “서울미래유산”으로 등재되어 강서구의 대표적인 문화자원이 되었을 것이다. 서울시가 매입하여 강서구가 한옥체험장이나 강서역사관으로 위탁 운영하였다면 양천향교와 함께 강서구의 향토문화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 지역사를 조사하면서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현재 강서구에 있는 서울미래유산은 환영클리닉(2014 공항동), 김용기과자점(2021 공항동), 궁산땅굴(2022 가양동) 세 곳이 있는데 답사를 다녀보면 서울문화유산으로 등재할 만한 곳이 더 많이 있다. 송강스님이 풍산심씨 종택을 매입하여 개보수를 거쳐 2004년 개화산개화사로 등록하였다. 개화산(開花山)의 화(꽃 화)자와 개화사(開華寺)의 화(빛날 화)자는 한자는 다르다. 99칸 한옥을 지을 때 심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은행나무와 칠엽수 나무가 보인다. 마로니에는 긴 잎자루 끝에는 손바닥을 펼쳐놓은 것처럼 일곱 개의 잎이 달려 ‘칠엽수(七葉樹)’라고 한다. 일본이 원산지이고 열매가 밤처럼 생겼는데 한약재로 쓰이기는 하나 독성이 있어 함부로 먹으면 안 된다. 참고로 서양의 칠엽수는 ‘마로니에(marronnier)’인데 지금은 일본 칠엽수를 마로니에라고 부른다. 서울 종로구 동숭동의 옛 서울대 문리대 캠퍼스에 일본 칠엽수가 여러 그루 있다. 1975년에 서울대가 관악구로 옮겨가면서 이 자리에 마로니에 공원을 만들어 대학로 일대 문화예술 거리의 명소가 되었다. 꽃말은 낭만, 박애라고 한다. 청백리 심수경,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을 조성하다. 다행히 풍산심씨 사당이 개화사 위에 꿋꿋하게 버티고 서서 풍산심씨 묘역을 지키고 있다. 개화산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은 1991년 서울시유형문화재 77호로 지정된 강서구의 대표 문화재 중 한 곳이다. 묘역 조성에 결정적인 역할은 심수경(1516~1599) 대감이 하였다. 아들 심일취와 함께 아버지와 형들의 묘역을 조성하였다. 심수경의 호는 청천당으로 심정의 손자이자 심사손의 큰아들이다. 1546년(명종 1년) 문과에 장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뒤에 대사헌과 8도 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1590년(선조 23년) 우의정에 오르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체찰사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이듬해 영중추부사가 되었다가 1598년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문장과 서예에도 능하였다. 묘갈은 1601년에 건립되었고 심수경이 스스로 지은 자갈명을 아들 심일취가 썼다. 심수경의 묘갈은 당대에 크게 유행하였던 원수방부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석비이다. 심사손(1493-1528)은 심정의 둘째 아들이다. 1513년(중종 8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17년 별시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에 들어가 사관으로 근무하였고, 1523년 비변사 낭관으로 서북면의 야인정벌에 공을 세웠으며 예조좌랑, 사간원정언을 거쳐 병조정랑이 되어 일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홍문관에 들어가 수찬, 응교를 지내고 1525년 경상좌도어사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전한, 직제학을 역임하였다. 1528년 다시 서북 변경의 여진족들의 출몰이 심해지자 당상관에 올라 만포진첨절제사가 되어 변방방어에 진력하다가. 야인의 기습을 받아 살해되었다. 당시 나이 겨우 36세로, 중종은 명신을 잃은 것을 매우 슬퍼하였다고 한다. 1580년에 건립된 심사손의 신도비는 아들 심수경의 사돈이자 당대의 권력자인 홍섬이 글을 짓고 왕희지체의 대가인 송인이 글씨를 썼으며 한준이 전액을 썼다. 심사손의 신도비는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화강암으로 조각한 두 마리의 이룡들이 매우 역동적으로 꿈틀거리고 있는 모습이 두드러져 보인다. 심정(1471~1531)의 호는 소요정이다. 심정은 연산군 1년(1495) 생원시에 합격한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1506년 중종반정 때 공을 세워 화천군에 봉해졌다. 중종14년(1519) 경빈 박씨를 통하여 조씨전국이라는 말을 궁중에 퍼뜨리고 왕을 움직여 기묘사화를 일으키고 결국 정권을 장악하기도 하였으나, 경빈 박씨의 동궁 저주 사건이 드러나서 강서로 귀양을 갔다가 이항, 김극핍과 함께 신묘삼간으로 지목되어 사사되었다. 심정은 문정공파의 파조로 심사손, 심수경, 심일취, 심제 등으로 이어지는 후손들의 기틀이 되었다. 심정은 구암에 소요정을 짓고, 많은 사대부를 양천으로 초빙하여 시문과 토론을 즐기면서 양천을 풍류의 고장으로 만들었다. 심정묘갈문은 1579년 손자인 심수경이 짓고 증손자인 심일취가 글을 썼다. 심정묘갈문에는 심정의 후손들이 느꼈던 심정 사사에 대한 억울함과 심정을 그렇게 만들었던 김안로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다. 심사공(1490~1155)의 자는 자온으로 심정의 큰아들이고, 심수경의 큰아버지이다. 문음으로 전연사 별좌에 처음으로 제수되었으며. 통훈대부로 원주목사를 역임하는 등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여 많은 칭송을 받았다. 아울러 효성스러우며 청렴결백한 것으로 이름이 드높았다. 비문에는 이런 심사공의 성격이 조카인 심수경의 눈으로 잘 드러나 있다. 심사공묘갈명은 조카인 심수경이 글을 지었으며 심수경의 아들인 심일취가 글씨를 썼다. 조선시대에 청렴결백한 관료에게 수여하는 청백리(淸白吏)의 명단 217명이 전해오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정창손, 고불 맹사성, 방촌 황희, 최만리, 이현보, 퇴계 이황, 오성 이항복, 율곡 이이, 오리 이원익, 사계 김장생 등이다. 강서구 출신으로 청백리에 녹선된 청천당 심수경 대감이 있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모범관료의 본보기가 되는 좋은 사례로 강서구의 대표 인물로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심수경 대감의 시 209수가 수록된 시집이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데 80세에 아들 일준을 낳고 지은 재미있는 한시 한 수 소개한다. 일준(日遵)을 생남(生男)하다 청천당 심수경 칠십에 아들 낳는 것도 드문 일인데어쩌자고 팔십에 또 애를 낳아이러니 조물주가 바쁠 수밖에모두가 늙은 나의 주책 없음이지七十生兒世所稀(칠십생아세소희)如何八十又生兒(여하팔십우생아)從知造物眞多事(종지조물진다사)饒此衰翁任所爲(요차세옹임소위) ​개화산 봉수대와 호국충혼위령비 개화산전망대 가는 길에 봉수대 모형 2개가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 봉수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함인데 원위치는 군부대 안에 있다. 조선시대의 봉수제는 군사적인 통신수단으로 설치 운영되었다. 전국에 643개의 봉화가 일정 거리마다 산꼭대기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봉수대마다 5개의 연대가 있어서 봉화의 개수로 신호하였다.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로 신호하였다. 경국대전 기록에는 평상시 1구, 적이 나타나면 2구, 적이 국경에 나타나면 3구, 적이 국경 내에 침범하면 4구, 접전 중이면 5구로 신호하였다. 비바람, 안개 따위로 횃불이나 연기 신호가 안 될 때는 봉수군이 차례로 말을 몰아 달려와서 보고하였다. 봉수 5개선의 제1거준은 함경도 경흥, 제2거준은 동래 다대포, 제3거준은 평안도 만포진, 제4거준은 평안도 의주, 제5거준은 전라도 순천에서 출발하여 모두 남산에 집결한다. 순천에서 이어지는 제5거준은 경기에 들어와서 수원, 안산, 인천, 부평을 지나 김포현 냉정산(북성산)에서 양천현(강서구)의 개화산으로 전달되면 바로 남산 5봉수로 전달된다. 개화산 봉수대는 남산으로 가는 5거준의 마지막 봉수로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었다. 봉수대가 있었던 개화산 일대는 관산(궁산)과 함께 임진왜란때 권율의 행주산성 전투를 지원한 후방 기지 역할을 했고, 한국전쟁때에도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중요한 진지로 활용되었다. 지금도 유사시를 대비한 군사 주둔 지역이다. 개화산에서 서쪽으로 호국충혼위령비까지 내려가는 길은 개화산호국의길이다. 신선대에서 멀리 김포공항 주변의 논을 볼 수 있는데 저곳에서 생산된 쌀은 경복궁쌀로 판매되고 있다. 호국충혼위령비는 6.25전쟁 중에 개화산 전투에서 산화한 1,100명의 국군 전사자의 영령을 기리는 비이다. 그들은 38선 접경의 황해도 연백지역을 지키다가 바다로 철수해 김포비행장을 거처 1950년 6월 26일 이곳 개화산에 방어진을 치고 전투를 벌였던 육군 제1사단 12연대 3대대장 김무중 소령 휘하부대였다고 한다. 중간에서 합류한 13연대와 15연대 부대원 일부도 포함되었고, 28일 밤까지 버티다가 전원 전사했다고 한다.​ 개화산 약사사, 석탑과 석불 이야기 개화산 약사사에는 서울시 유형문화제 제39호인 3층석탑과 제40호 석불이 있다. 석탑과 석불은 고려말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불의 두툼한 두 눈과 가는 미소를 머금은 입술이 특징이다. 고려말 지방 호족이 성장과 관련된 불교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겸재 정선의 <경교명승첩>과 <양천팔경첩>에 각각 개화사(開花寺) 그림이 있는데 <경교명승첩>의 개화사 그림에는 황포 돛배 한 척이 밀물을 따라 한강을 올라가고 있다. 겸재 정선의 그림에는 약사사가 아니라 개화사이다. 영조 때 좌의정을 지낸 송인명(1689-1746)이 젊은 시절 개화사에 기거하며 글공부했다고 한다. 사천 이병연이 송인명에게 보낸 한시 한 수가 <사천시초>에 전해온다. 개화사(開花寺) 사천 이병연 봄이 오면 행주배에 오르지 마오.손님 오면 어찌 꼭 소악루만 오르려 하나책을 삼여에 다 읽을 곳이라면,개화사에서 등유를 소비해야지春來莫上杏州舟(춘래막상행주주)客到何須小嶽樓(객도하수소악루)書冊三餘完課處(서책삼여완과처)開花寺裏費燈油(개화사리비등유) ※三餘(삼여) 책을 읽기에 적당한 한가한 때. 겨울, 밤, 비가 올 때 송인명은 개화산 개화사가 마주 보이는 강 건너 행주나루 언덕에 별서 장밀헌을 짓고 묵객들과 풍류를 즐겼는데, 겸재 정선은 <행호관어> 그림을 그리고 사천 이병연은 그림을 보고 또 한시를 읊었다. 행호관어(杏湖觀漁)​ 사천 이병연 늦은 봄에는 복어국을 먹고초여름에는 웅어회라.복사꽃 물에 가득 떠내려오면어망은 행호 밖에 두어야 하리.春晩河豚羹(춘만하돈갱) 夏初葦魚膾(하초위어회)桃花作漲來(도화작창래) 網逸杏湖外(망일행호외) 고 정차점님이 개화산 임야를 어떤 연유로 소유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고인의 유지에 따라 상속인들이 임야 약 1만 1천여 평을 강서구민의 건강과 여가 활용을 위해 강서구에 기증하였다. 2009년 강서구청에서는 기증하신 분의 숭고한 뜻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아름다운 공원으로 조성할 것을 약속하며 기념비를 세웠다. 기증자들의 아름다운 마음이 이곳을 오가는 많은 사람의 마음에도 새겨지기를 소망한다. 개화산 약사사 주변에 넓은 헬기장이 있어 매년 1월 1일 강서구 해맞이 행사가 이곳에서 한다. 늦가을에 강서구 주민들을 위한 산사음악회를 한번 시도해보는 것도 강서구의 문화예술행사로 검토해볼 만하다. ​방화근린공원 민속마당에서 전통놀이와 짚공예 체험 약사사에서 지름길로 내려오면 바로 방화근린공원이다. 강서구에서 제일 넓은 근린공원으로 해마다 강서구립도서관이 연합으로 주관하는 동화마을축제, 강서진로직업체험지원센터에서 주관하는 Dream Job페스티벌, 강서봄빛페스타 등 많은 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방화근린공원 내에 있는 민속놀이마당에서 길꽃어린이서관이 청소년들과 주민들에게 잊혀가는 전래놀이와 짚공예 체험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지역 노인들에게는 추억을 되살리는 놀이문화로 맥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며, 다문화 가족들에게도 전통놀이를 통하여 한국 생활에 적응하도록 도와주고 있다. 전래놀이는 팽이치기, 자치기, 제기차기, 굴렁쇠굴리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새총놀이, 땅따먹기, 비석치기, 사방치기, 공기놀이, 줄넘기, 망 던지기, 달팽이놀이, 고무줄놀이 등이 있다. 짚공예 체험은 새끼꼬기, 달걀꾸러미, 잠자리만들기, 조리만들기, 짚신만들기 등이 있는데 사라져가는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하고, 세대 간 격차도 줄이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공원 내에는 주민들의 건강증진과 휴식을 위해 202미터의 맨발황톳길을 조성하였다. 2023년 개관한 강서구립 강서별빛우주과학관에는 관내뿐만 아니라 서울시민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다.​ 강서구 교통기업 김포교통과 강서구립 길꽃어린이도서관 지하철 5호선 종점이 방화역인데 지하철 5호선이 개통되기 전에는 1970년에 설립한 김포교통이 강서구 주민의 발 역할을 했다. 김포교통 차고지가 방화동에 있는데 김포교통은 50년이 넘은 강서구의 대표적인 교통기업으로 강서구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고 할 수 있다. 현재 651번, 654번, 672번 세 개의 간선버스(파란색)와 6629번, 6648번, 6712번 세 개의 지선버스(초록버스)를 운영하고 있다. 강서구에는 8개의 구립 도서관이 있는데 2007년에 길꽃어린이도서관이 첫 번째로 개관하였다. 강서구립도서관은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8개 구립도서관이 서로 잘 연계되어있고, 관내에 28개의 작은도서관을 지원하며 매년 방화근린공원에서 구립도서관과 작은도서관이 모두 참여하여 동화마을축제를 한다. 책 읽는 강서, 문화의 강서가 되는데 강서구립 도서관들이 앞장서고 있다. 동화마을잔칫날 국수집은 김동운 길꽃어린이도서관 초대 관장이 어르신들의 일자리도 창출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고자 제안하여 2009년 3월에 시작한 동네 가게다. 국수가게를 운영해 얻은 수익금은 전액 지역 어린이와 주민들에게 돌아간다고 한다. 잔치국수로 더욱 따뜻한 강서가 되기를 소망하며 개화산 청백리길의 이야기가 더욱 풍성해지기를 바란다. 권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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