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태창과 고양이의 눈인사상태창과 고양이의 눈인사 #4 “우산 가져왔어?” 혼자만의 생각에 어깨까지 푹 잠겨 있는 서온에게 사장이 붕붕 손바닥을 흔들어 보였다. “네, 네?” “우산 가져왔냐고. 비 많이 오는데.” “아, 그래요?” 서온은 사장의 시선을 따라 가게 밖을 내다봤다. 통유리 창 저 너머로 보이는 큰길가에 굵은 빗방울이 바가지로 뿌려 대는 것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우산을 바짝 눌러 쓴 채 한낮에도 어두컴컴한 길을 걸었다. 쏴아아 쏴아아 요란하게 내리는 비는 가게 앞의 나무 데크도 흠뻑 적셔 놓았다. 나무 데크는 제빵사가 해바라기를 하기 좋아하는 자리였다. 목이 낄 뻔한 날 이후로 제빵사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가슴 한쪽이 뻐근하게 아팠지만 서온은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서온은 일을 마치고 비가 내리는 길가로 나섰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챙겨 온 큼지막한 장우산을 펼치려는데, 무언가 다가왔다. “……삼치야?” 바로 옆에 있는 미용실 처마 밑에 숨어 비를 피하연 삼치가 서온을 발견하자마자 도도도 달려왔다. 삼치는 네 발로 선 채 고개를 들어 서온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떨어지는 빗방울이 잘 그루밍해 놓은 삼치의 빳빳한 털 사이로 자꾸만 스며들었다. “왜 여기 있어?” 고양이는 자기 생활권이 정해져 있는 영역 동물이다. 궁산과 그 일대에서 대장 노릇을 하는 삼치는 그중에서도 영역 의식이 강해서 평소 다니던 길이 아니면 잘 나타나질 않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비가 오는 날에, 제 영역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 삼치가 나타난 것이다. 삼치는 빗방울이 눈가를 두들기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꼿꼿하게 수염을 세우고 서온을 올려다봤다. 무언가 일이 터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삼치가 여기까지 찾아왔을 리가 없다. 직감 같은 깨달음이 서온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서온은 손가락을 펼친 오른손을 삼치에게로 내밀려다가…… 툭, 떨어트렸다. “안 돼……. 나는 아무것도 못 해 삼치야…….” 서온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코끝이 찡했다. 서온은 고양이에 대해 잘 몰랐고, 누군가를 대하는 게 너무나도 서툴렀고, 남의 일에 휘말리는 것이 두려웠다. 고양이들의 힘든 사정을 알게 되는 것이 무서웠다.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비참한 현실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부끄럽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은 그들의 아픔과 상처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서온은 그럴 자신이 없었다. “……미안.” 서온은 비겁한 사람이었고,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눈을 돌리고 달아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서온은 발을 옮겼다. 흔들림 없이 단단한 자세로 서온을 바라보는 삼치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게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달랬다.그런 서온을 짧은 소리가 붙들어 세웠다. “먀앙!!” 삼치가 가늘고 떨리는 소리로 울었다. 서온은 달아나려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삼치는 쏟아지는 장맛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꼿꼿하게 네 발로 서 있었다. 비구름에 가려 어두워진 날 때문에 한껏 확장된 참치의 동공이 떨리고 있었다. “삼치야……?” 길고양이는 울지 않는다. 길고양이가 우는 것은 어린 새끼를 가르칠 때나 다른 고양이와 싸울 때뿐이다. 삼치는 그 어떤 사람에게도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고양이들의 방법으로 대장 고양이 역할을 해 왔다. 그런 삼치가 서온에게 말을 걸어왔다. 가늘게 떨리는, 불안정한 목소리로. 소심한 마음을 삐쭉 뚫고 솟아난, 송곳처럼 뾰족한 그 목소리는 서온 그 자신의 것과 비슷했다. 서온은 어느새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화알짝 펼친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상태창!” 대화란 주고받는 것이다. 삼치가 어떻게서든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서온은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서온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토록 바랐던 대응을, 삼치에게 보여 줘야 했다. 〔도와줘.〕〔위험해.〕〔따라와.〕 짧은 울음에는 담기지 않은 삼치의 마음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삼치는 목소리가 닿은 것을 알았는지 급하게 어디론가 뛰어가기 시작했다. 서온은 덩달아 삼치를 따라 뛰었다. 어디인지는 몰라도 가야만 하는 곳이 생겼다. * 빗길을 겅중겅중 뛰어가는 삼치를 따라 도착한 곳은 가양나들목 진출입로 옆으로 펼쳐진 수풀이었다. 길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 평소에는 들어갈 일이 없는 땅에는 올림픽대로에서 마음 놓고 쌩쌩 내달리는 차들이 튀겨 대는 물보라가 수시로 튀었다. 옆에서 쏟아지는 물을 꼼짝없이 온몸으로 맞으며, 서온은 얼마 전 죠안나라는 이름의 삼색 고양이가 차에 치여 죽은 곳이 이 근처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삼치야, 얼마나 더 가야 해? 여기 맞아?” 삼치는 귀끝을 살짝 까딱거리더니 허벅지 높이까지 자라난 풀들 사이로 나아갔다. 서온은 한숨을 푹 쉬고는 삼치의 뒤를 따랐다. 비를 맞아 싱싱해진 이파리들이 샌들과 반바지 사이로 드러난 서온의 살갗을 쿡쿡 건드리고 긁어 댔다. 서온이 불평을 하려는 때, 저 앞쪽에서 가느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먀……악…….” 꼬리를 꼿꼿하게 세운 삼치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얼른 내달렸다. 서온도 불만을 씹어 삼키고는 무릎에 힘을 줬다. 삼치를 쫓아 들어간 수풀 안쪽에는 구덩이가 하나 있었다. 땅이 움푹 꺼져 만들어진 구멍은 꼭 굴착기로 지표면을 크게 퍼낸 것처럼 생겼다. 서온의 허리까지 푹 잠길 정도로 깊은 구덩이에는 흙탕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고양이가 있었다. “먀악……!” 손바닥만 한 새끼 고양이였다. 아직 머리가 덜 자라 박쥐처럼 큰 귀를 덜렁거리는 새끼 고양이는 털이 흠뻑 젖은 채 어떻게든 쏟아지는 흙탕물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하얀 바탕에 갈색과 검은색 반점이 있는 삼색 고양이. 사고로 엄마를 잃고 구덩이에 숨어든 새끼 고양이. 구덩이 밖으로 나갈 방법이 없는, 죽을 위기에 처해 있는 작은 아기 고양이. 생각을 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서온은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져 버리고는 구덩이로 달려갔다. 길게 늘어지는 삼치의 경고가 등 뒤로 따라붙었다. 서온은 구덩이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입고 있던 옷이 흙탕물에 흠뻑 젖어 몸에 달라붙었다. 위에서 아래에서, 덩어리 진 물들이 얼굴을 덮쳤다. 입에서는 작은 모래 알갱이가 씹혔다. 서온은 순식간에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으나 힘을 내 팔과 다리를 움직였다. 저 앞에는 한참 전부터 삐약삐약 울어 댔을 자그마한 생명체가 있었다. 서온은 진흙투성이가 된 채 새끼 고양이에게 기어갔다. 새로운 위협과 마주한 고양이는 몸에 비해 가늘고 길쭉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달아나려 했지만 삼치가 저 위에서 뭐라고 아웅거리자 움직임을 멈췄다. 서온은 최대한 물기를 털어 낸 손으로 새끼 고양이를 집어 들었다. “상태창!” 벌벌 떠는 고양이의 머리 위로 반투명한 상태창이 떠올랐다. 서온은 얼른 글자들을 읽었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고양이는 잔뜩 겁에 질렸으면서도 서온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 서온은 상태창의 마지막 문장에 시선을 던졌다. 〔당신을 믿고 있습니다.〕 서온은 쓰게 웃었다. 이렇게 한심한 꼴을 하고 있는데, 도대체 뭘 보고 믿는다는 걸까.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부담스럽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한 그 문장이 그저 싫지만은 않았다. “이제…… 올라가 볼까?” 서온은 고양이를 품에 안고는 위를 올려다봤다. 구덩이는 밖에서 볼 때보다 안에서 볼 때 훨씬 깊었다. 사방에서는 물줄기가 쏟아졌고 땅은 힘을 조금만 줘도 우수수 무너졌다. 새끼 고양이가 이 깊은 진창에서 느꼈을 절망감을 이해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그래도 서온은 포기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떻게든 해내야 했고, 해낼 생각이었다. 왜냐면, 순진한 새끼 고양이가 얼굴을 맞대고 전하는 믿음을 실망시킬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서온은 삼치가 기다리고 있는 저 지표면을 향해 힘껏, 오른팔을 내뻗었다. * “야! 인형은 건들지 말라 그랬지!” “먀아!!” 서온이 잘근잘근 씹혀서 넝마가 된 애착 인형을 쥐고 흔들며 잔소리를 하자 고양이가 마주 소리를 높였다. 인형 같은 건 모르겠고 얼른 밥이나 내놓으라는 뜻인 줄은 이제 상태창을 보지 않아도 뻔했다. 서온은 호시탐탐 발가락을 노리는 고양이의 솜방망이 같은 앞발을 피하며 밥그릇에 사료와 물을 채웠다. 먹구름이 가득 낀 날 구조해서 앞으로는 맑은 하늘 아래에서만 살아가라고 이름을 하늘이라고 지어 줬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사냥꾼이나 정글러나, 뭐 그런 이름을 지어 줄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집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하늘은 결국 집사의 발목에 이를 박아 넣고 말았다. “아야! 너 진짜!” 서온이 언성을 높이자 하늘은 얼른 달아나서 어느샌가 슬금슬금 늘어나고 있는 고양이 용품들 사이로 쏙 숨었다. 서온은 한숨을 푹 쉬었다. 캣맘들은 하늘이 한창 캣초딩일 때니 어쩔 수가 없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 차분해질 거라는데, 서온은 그 말만을 믿었다. 발가락 사냥을 그만둬야 입양을 보내든가 말든가 할 테니까. 서온은 하늘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임시 보호를 하겠다고 선언했고, 캣맘들은 20년 임보도 임보는 임보라며 코웃음을 쳤다. 어제 배송 온 캣타워는 퇴근하고 돌아와서 조립하기로 하고, 서온은 나갈 채비를 했다. “혼자 잘 놀고 있어. 이따 봐!” 그새를 못 참고 자기 꼬리를 쫓던 하늘이 커다란 귀를 쫑긋 세웠다. 짙은 갈색 얼룩이 있는 코를 쫑긋거리고 있으면 살짝 바보 같아 보였는데, 그게 또 하늘의 귀여운 점이었다. 서온은 하늘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집을 나섰다. 진창에서 한참을 허우적거리며 소란을 피운 날 이후 서온은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상태창 스킬을 발동하지 않았다. 하늘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상태인지 상태창으로 보는 대신 하늘의 귀끝, 수염, 입, 네 발, 그리고 꼬리를 관찰했다. 불만이 있을 때 꼬리는 어떻게 반응하는지, 만족스러울 때 수염은 어떤 각도를 그리는지, 가끔 멍청하게 혀를 빼 물고 있는 이유는 뭔지, 그런 것들을 착실하게 살폈다. 하늘이 하는 말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더는 커뮤증이라는 이유로 회피하고 싶지 않았다. 신나는 일은 신나게, 힘든 일은 힘들게, 함께 헤쳐 나가기로 결심했다. 장맛비가 쏟아지던 그날 그 구덩이에서 하늘이 보여 준 신뢰에 보답하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서온은 자동차 공업소와 낡은 빌딩 사이에 난 오르막길을 올라 낯익은 삼거리에서 멈춰 섰다. “안녕, 삼치야?” 서온을 발견한 삼치가 살랑, 꼬리를 흔들었다. 삼치는 서온을 그럭저럭 써먹을 만한 조력자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기분이 좋으면 먼저 다가와 머리를 부비기도 했다. 그래도 서온은 먼저 삼치를 쓰다듬거나 쿡쿡 찌르지는 않았다. 길고양이와의 거리는 그 정도가 딱 적당했다. 관계에서의 적정 거리. 서온은 이제 그것이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또 봐!” 신호가 바뀌자 서온은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깡충깡충 뛰어서 흰색 선만 밟는 발걸음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다. 오늘은 바보 같은 사장의 농담도 두 번 정도는 받아칠 수 있을 것 같았다. * 삼치는 멀어져 가는 서온을 지켜보다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자 서온의 머리 위를 둥둥 떠다니는 반투명한 상태창에 메시지가 추가되었다. 〔윤서온 님이 삼치 님으로부터 축복 ‘고양이의 눈인사’를 받았습니다.〕〔상태: 고양이의 눈인사(157/10,000〕 축복이 제대로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삼치는 꼬리를 살랑, 흔들었다. 서온이 하늘을 구출한 이후 동네 고양이들은 서온을 발견할 때마다 축복을 내렸다. 당장은 아무런 효력도 없는 자그마한 인사에 불과하지만, 고양이의 눈인사가 1만 번이 쌓이면 놀랍게도…….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삼치는 입을 쩌억 벌리고 크게 하품을 했다. 서온에게 축복이 만 번 쌓일 때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 같다고, 대장 고양이다운 통찰력으로 내다본 삼치는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낮잠을 자기 좋은 자세를 취했다. 그러고는 스르르 잠들었다. 배고프고 험난한 길고양이의 삶에는 달콤한 낮잠이 필요했다. 많이, 아주 많이 말이다. <상태창과 고양이의 눈인사 > 끝 송한별장르 소설 작가 겸 편집자. 돈과 명예, 재미 중에서는 아무래도 재미인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