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구 토박이 혁이의 우리 동네 플렉스 방법 목차강서구는 왜 노잼 도시라 불릴까?강서구 청개구리화곡동은 내 아지트화곡초, 마포중, 명덕고 강서구 토박이의 과거 일상혁이의 강서구 플렉스 방법강서구 MZ들은 어디서 플렉스 하는가? [화곡초, 마포중, 명덕고 강서구 토박이의 과거 일상] 화곡초등학교는 늘 떠들썩했다. 나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면 혁이와 아이들 때문이었다. 당시 6학년 담임 선생님께 호되게 혼났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제발 말 좀 들어라.” 그에 대한 내 답변은 간단명료했다. “싫은데요?” 그래서 늘 부모님 출석 요구는 당연시되었던 유년 시절이었다. 엄마는 늘 나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곤 했다. “너 나중에 커서 뭐 될래?” 내 답변은 똑같이 한결같다. “세상이 내 놀이터였으면 좋겠다.” 그렇다. 아직 어리고 철이 없던 탓에 1차원적 답변을 내놓았지만 난 언제나 내 가슴속 한편에 큰 포부를 달고 살았다. “정말 난 크면 세상을 재미있게 꾸미고 싶다고요.” 그 말이 씨가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그렇게 졸업식 전에 내 생활기록부를 점검하던 담임 선생님은 나를 따로 호출하셨다. “진혁아, 학원도 가고 이제 슬슬 공부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그 말에 반은 동의했지만, 오히려 내 신념을 흔들 수는 없었다. 곧이곧대로 어른들 말만 듣다가 내 인생 나락 갈 수 있다는 생각이 어릴 적부터 꿈틀꿈틀 분출될 때마다 난 태권도 친구들, 야구부 친구들과 함께 볏골공원에서 하루살이를 즐기며 우리들의 모략을 꿈꾸기도 했다. 당연히 주선은 내가 했다. “얘들아. 중학교 된다고 꿈과 희망 버리지 마. 공부가 전부가 아니야. 엄마 말 믿지 마!” 그렇게 우린 단합이 잘 버무려져 강서구 청개구리 제1호가 되었다. 2005년 기준으로 우리는 발을 넓혀갔고, 화곡동 아지트는 걸어서 10분 거리인 거성빌라였다. 학원에서 굳이 무얼 배울까? 글쎄. 아직도 그렇게 생각한다. 정말 당시 난 현실적인 낭만주의자인 건 분명했다. 화곡동을 재미있는 나만의 아지트로 만들고 싶었다. 사실 아이들이 불쌍했다. 아니 나를 포함한 화곡동 친구들이 목동 넘어 학원가에만 가야 하는 처지가 안쓰러웠다. 그 당시 난 무슨 생각을 했길래 이러한 전략을 세웠을지 의아할 상황은 아니었다. 단지 “왜 우리가 공부만 해야 해? 아니 기타도 치고, 봉제산에서 비비탄 놀이도 하고, 우리만의 플리마켓 만들면 되지 않아?” 얼떨결에 질문 던진 나의 욕심에 함께 있던 친구들이 대부분 옹호하고 동조했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혁이와 아이들 청개구리들의 강서구 수호대 프로젝트를 말이다.2007년 당시 마포중학교 멤버들은 여전했다. 화곡초 아이들의 50퍼센트 정도, 내가 알던 친구들이 학교 뺑뺑이 시스템으로 이곳에 정착했다. “야 드디어 우리가 만든 프로젝트 결실을 현실로 승화할 때가 왔구나.” 마포중학생 당시 부모님께 호되게 혼났던 기억만 남았다. 그래도 그 사랑의 충고와 몽둥이가 나를 오히려 엔도르핀을 쌓게 해주었다. 부모님 감사드립니다.덕분에 내가 무얼 해야 할지 진로 고민은 뒷전치고 당시 2학년 담임 선생님께 마포중 대동제 기획서를 대뜸 내밀었다. 당연히 기가 차듯 기획서를 그 자리에서 찢어버렸던 선생님이셨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기술가정 시간에 배웠던 PPT를 적극 활용하여 10페이지가량의 대동제 행사 기획안을 알차고 재미있게 제시했다. 학교의 정해진 예산과 달리 터무니없이 부족했던 행사 프로젝트에 담임 선생님은 가만히 침묵하시더니 한참 행사 내용을 바라보다 적어도 우리 학교에는 문화에 관심 있는 입지가 적다는 것을 발견하곤 교감 선생님께 보고를 드리겠다고 하셨다. 그 당시 우리 나이는 불과 15살이었다. 대동제 내용은 간단했다. 당시 서든어택 대항전을 만들자는 것이다. 학교 대항전에는 왜 항상 축구와 야구뿐일까? 의아했던 우리는 프로게이머를 꿈나무들의 리더 역할이 되고 싶었던 전략을 구차하지만 진실되고 그에 걸맞은 정략적, 정성적 효과까지 꼼꼼히 넣었다. 사실 이 뒷배경에는 당시 이벤트 업계에 종사하던 삼촌의 역할이 무지하게 컸다. (물론 지금까지 우리 부모님은 모르신다.) 이 기획안이 통과되기 전까지는 우린 공부에 매진하는 척했다. 사실상 그 시간에 우리는 우장산 구민회관 근처 플리마켓 프로젝트까지 생각하고 이미 PPT로 구상 중이었다. 하지만 아직 어렸던 우리는 현실적 한계에 도달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공부라는 경쟁 요소가 아닌 프로젝트 멤버로 활동한 우리들이 스스로 자랑스러웠고 사춘기를 넘어선 단체적 정체성에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제야 우리가 해야 할 과업과 업무가 무엇인지 뒤늦게 담임 선생님께 전달받고 마포중 대동제 프로게이머 결산 결재가 처리될 때였다. 한 달이란 시간이 남았을 때 중간고사까지 해야 했던 그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우린 멤버를 더 초청하기로 했다. 공부를 잘하되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한 친구들(기획), 특히 수학 기초가 뚜렷했던 친구들(예산), 이걸 실행하게끔 유도하는 친구들(홍보/영업) 등 한 10명을 대거 섭외했다. 당연히 우리 반은 대동제에만 매진하니 꼴등반이란 타이틀을 얻게 되었지만, 오히려 선생님은 교장선생님이 대동제만 지켜보고 있으니 동아리나 CA 시간에 더 분발하라고 다독이셨다. 그런 시너지를 만들 수 있던 배경에는 마포중학교의 개방적인 분위기도 한몫했다.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내 모교를 양아치 학교라 욕할지언정 우리는 학생들이 *문화예술 활동에 얼마나 매진하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고, 결과적으로 큰 무대에 우리가 흘린 땀과 피를 증명하고 싶었다. 그런 결과로 학교 대항전에서 준 프로게이머가 여러 명 출전되면서 마포중학교는 강서구의 E스포츠 우수 학교로 입증되었다. 당연히 대동제에만 매진한 결과로 우리의 성적은 곤두박질쳤지만, 오히려 괜찮았다. 그 또한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증명한 청개구리들의 프로젝트 결과물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또 한 번 고등 진학으로 인해 헤어졌다. 우리의 전성기는 끝이 났다.2011년 명덕고 학생 중 우리들이 있었다. 여전히 마포중에서 함께했던 아이 중 70퍼센트는 같은 고등 생활을 했다. 하지만 점차 자신의 현실적 감각을 깨닫고 한계에 치닫자 우리는 수호대 역할을 그만두고 진로와 공부에 뒤늦게 매진하기로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적어도 우리가 사춘기 시절 남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강서구 청개구리가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포트폴리오였다. 단지 우리는 공부와 결이 달랐던 그저 한낱 철없이 강서구를 재미있는 아지트로 만들고 싶었던 멤버들이었다. “그래서 잘 지내고 있니. 친구들아. 강서구는 여전히 우리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 거리를 거닐 때마다 너희들이 보고 싶구나. 난 언제나 기다리고 있단다. 마포중 앞 홈플러스에서 말이다. 여느 날 마포중의 담벼락이 무너지는 대신 우리들의 추억으로 단단히 쌓여가고 있었단다.”항상 현실적 쓴소리 자자했던 K는 기획팀 마케팅 부서 고공행진 중이었다. 5년 전 잠깐 만났을 때 물어보니 우리들의 학창 시절 도움 지기 역할이 컸다고 한다. 괜스레 우린 멋쩍은 웃음과 함께 농밀도 가득한 술잔 치기를 강서 구청 먹자골목에서 연거푸 이어갔다. H는 행사 관련 업계 현장에서 5년 넘게 일을 하고 있다. J는 강서구의 반대편 성수에서 팝업스토어 관련업을 하고 있다. 그 외 친구들의 소식은 깜깜무소식이다. 어쩌면 우리의 작은 과오가 큰 기회로 만든 게 분명했다. 비록 성적표를 다시 꺼내 우리가 현실 적응에 노력했다고 자기 만족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적어도 강서구를 재미있게 만들도록 노력했던 건 분명히 증명되었다. 공부가 전부라고 생각한 친구들에게 이 글을 바치고 싶다. “미안하지만 얘들아. 지금이라도 강서구를 재미있게 만들 후대 멤버를 구한단다. 바로 너희들이야.” 갓혁행사 축제 기획자이자 레트로를 지향하는 예술가입니다.평범한 시각보다는 다채로운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는 강서구 청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