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 역사문화 탐방로드동방의 히포크라테스 허준, 양천현에서 태어나다 허준동의보감길 동방의 히포크라테스 허준, 양천현에서 태어나다 구암 허준(1539~1615)은 시조인 허선문의 20세손으로 할아버지는 경상우수사를 지낸 허곤이고, 아버지는 용천부사를 지낸 허론이다. 허론은 본가가 양천현 능안마을(능곡동:지금의 등촌2동)에 있었으나 첩실이 임신하자 공암(지금의 가양2동) 근처에 거처를 마련해 주고 왕래하였다. 허론의 서자였던 허준은 공암일대에서 어린 시절을 생모와 함께 보냈던 것으로 추정된다. 허준의 출생년도는 임진왜란후 공신 기록인 <태평회맹도>에 호성공신숭정대부 양평군 허준 기해년(1539) 생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내의원에서 편찬한 <내의선생안(명부)>에는 정유년(1537)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허준기념사업회와 허준박물관은 <내의선생안>의 1937년생을 따른다. 강서구 화곡동 봉제산 능안마을에 살던 판도좌랑공파 허씨 후손들은 마을이 1963년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마을 전체가 큰 도로로 변하고, 국군수도통합병원(현 아이파크 아파트) 부지로 강제 수용되어 뿔뿔이 흩어지고, 통합병원 뒷마을인 백석마을의 허씨 집안만 유지하였다.허준의 큰 할아버지 허숙의 집안은 대대로 농곡동 백석마을에 묘를 썼는데 양천허씨 세마공파 족보에 의하면 백석중학교가 들어서기 전에 60여기의 양천 허씨 묘소가 이곳에 있었다. 그러나 1977년부터 일대에 주택단지가 들어서면서 학교를 세우기 위해 백석마을 뒷산의 양천허씨 묘소를 대부분 화장하였고 일부는 경기도 용인으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미암 유희춘, 허준을 내의원으로 천거하다. 허준은 비록 서출이었으나 허종, 허침 등 유명한 한의학자를 배출한 판도좌랑공파 집안이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한의학 지식을 배울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 아버지 허론도 허준이 의술을 공부할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한 것으로 보인다. 1999년 <허준>드라마가 크게 인기가 있었는데 실제 허준의 일대기와는 다른 허구의 인물과 얘기가 많아 아직도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가공의 명의 유의태(이순재 분), 예진(황수정 분), 가공의 마을 경남 산청이 등장한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대중은 사극 드라마의 영향을 받게 된다. 미암 유희춘(1513~1577)은 실존 인물로 조선시대 개인의 일기 중 가장 방대한 미암일기(보물 제260호 지정)를 남겼다. <미암일기>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부록으로 유희춘과 그 부인 송씨의 시문과 잡록도 수록되어 있다. 유희춘은 선조 당시 동인의 영수급이었던 허엽의 절친한 친구이며 허엽의 두 아들 허성과 허봉의 스승이다. 허성과 허봉은 양천 허씨 21세손이고 허준은 20세 손이나 나이가 비슷하여 친구처럼 지냈으며 일가 간이기 때문에 유희춘의 집에 함께 가기도 하였다. <미암일기>에는 허준에 대한 기록이 자주 나온다. 허준은 29세 되던 해인 1568년 서울에 거주하면서 미암 유희춘을 만난다. 유희춘은 이때 유배지에서 풀려나 관직에 복귀하여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해 2월 허준이 《노자》, 《문칙》, 《조화론》 등 3권의 책을 선물했다. 허준은 유희춘의 부인 송덕봉이 혀가 부어오르는 증상인 설종이 생기자 송덕봉의 설종병을 상담해주었다. 또한 유희춘의 얼굴 좌측에 종기가 생기자 허준이 치료해 주었다. 이처럼 허준과의 각별한 인연 때문이었는지 유희춘은 1569년 6월 이조판서 홍담에게 허준을 내의원에 천거해 달라고 편지를 써서 부탁한다. 허준은 종9품으로 내의원에 들어가 1571년 종4품 내의원 첨정이되고, 1573년에는 정3품의 내의원정에 오른다. 1590년 광해군의 두창(천연두)을 치료한 공로로 통정대부 작위를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해 선조를 의주까지 수행했다. 1604년 호성공신, 양평군의 군호와 종1품 숭록대부를 받았다. 1610년 동의보감을 완성하였다. 1615년 광해군은 허준에게 정1품 보국승록대부의 작위를 추서하였다. 허준테마거리를 조성하다 강서구는 지하철9호선 가양역 1번출구부터 허준박물관까지 허준테마거리를 조성하고 안내판 설치와 여러 가지 조형물을 설치하여 길을 따라 걸으며 허준의 일대기를 엿볼 수 있게 하였다. <탐라영재관> 가양역 1번 출구로 나오면 허준일대기 안내판과 뜻밖에 제주 돌하르방 한 쌍을 만난다. 탐라영재관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탐라영재관은 수도권 지역에 유학 중인 제주 출신 학생들을 위하여 서울에 기숙사 시설이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1980년대 말부터 거론되기 시작한 도민 숙원사업이었다고 한다. 애초 이 사업은 임대사업 위주로 <서울제주회관>을 건립하기 위하여 1997년 2월 서울시로부터 건립 대지 632평을 39억원에 매입하여 1998년 3월 착공하였다. 착공 후 재원 조달이 어려워 대형사업의 조정심의 과정에서 사업유보 대상으로 검토하였으나, 사업 포기 시 입게 될 재정 손실은 물론 서울에 기숙사를 마련할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게 됨에 따라 재원 조달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99년 2월 문화관광부로부터 40억원을 지원받았고, 복권 판매수익금 25억원을 투입하여 제주도의 재정 부담을 크게 줄여 나가면서 애초 3개층 126명 수용 규모를 6개 층에 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 시설로 변경하여 2001년 1월 건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쪼록 탐라영재관에서 유학 생활을 마친 제주 출신 청년들이 후에 제주도와 대한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청년들로 선순환되기를 기대한다. <서울시 건축상 대상, 서진학교가 들어서다> 보도블록과 내의원 조형물에 써놓은 처방을 읽으며 걷다 보면 어느새 홈플러스 가양점에 도착한다. 홈플러스 가양점은 다른 점포와 건물 생김새가 다른데 프랑스의 대형 할인점 ‘까르푸’가 있었다. ‘까루푸’는 프랑스어로 사거리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월마트와 함께 현지화에 실패하고 여러 가지 논란 끝에 2006년 철수했다. 신흥 유통재벌 이랜드그룹 홈에버로 바뀌었다가 2008년 홈플러스에 매각했다. 당시 유럽 스타일의 진열대와 바퀴 달린 쇼핑카트도 이동할 수 있는 에스컬레이터가 인상적이었다. 까르푸의 실패는 국제 시장에 진출할 때 현지화 전략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하였다. 안타깝게도 가양동 어린이가 급감하면서 서울시교육청은 공진초등학교를 마곡지구 아파트입주로 어린이가 급증한 마곡동으로 신축 이전하였다. 문제는 가양동 공진초 자리에 서진학교를 건립하기로 하면서 지역 주민의 반대로 갈등이 생겼다. 서진학교는 발달장애 학생들을 위한 특수학교이다. 국립한방병원를 유치하겠다는 지역구 국회의원의 공약도 갈등에 한몫하였다. 주민간담회에서 발달장애 학생 어머니들이 무릎을 꿇고 읍소하는 장면이 TV 뉴스에 나왔다. 다행히 지역 주민들의 이해와 협의로 발달장애 학생들을 위한 서진학교가 세워졌다. 서진학교가 개교할 때까지 과정을 담은 “학교가는길” 다큐영화가 개봉되기도 했다. 적은 공사비로 완성도 높은 건축물을 구현한 서진학교는 코어건축사사무소가 설계했는데 2021년 제39회 서울시 건축상 대상에 선정됐다. 공공 기여와 건축 혁신, 사회적 책임 심사 기준을 충실히 충족했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교육, 문화, 예술분야의 지역균형발전을 주장하는 구민 중에는 약 100만평의 마곡지구가 개발될 때 입지 조건이 더 좋은 곳에 유비쿼터즈 환경을 갖춘 특수학교를 세우고, 공진초등학교 건물과 부지는 강서구의 평생교육관이나 청소년문화예술학교로 운영하자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었다. 아무쪼록 돌봄이 필요한 노인층과 발달장애 학생들이 공생할 수 있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강서구가 되기를 희망한다. <허준동상과 에코스쿨>허준테마거리에 세운 허준 동상은 김운성.김서경 부부작가의 작품이다. 두 사람은 평화소녀상 작가로 유명하다. 강서유수지공원(옛 마곡 빗물펌프장)에 세운 강서구 평화소녀상과 황금자할머니 상도 두 사람의 작품이다. 허준테마거리 끝에 공진중학교가 폐교로 남았다. 강서양천교육지원청을 고치는 중이라 임시로 이곳을 사용하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환경부, 서울시와 함께 공진중학교 자리에 에코스쿨(생태전환교육파크) 조성 협력과 기후·환경교육 활성화를 위한 업무 협약을 맺었다고 한다. 연면적 6천783㎡ 규모로 들어서는 에코스쿨은 기존 폐교 시설을 환경친화적 리모델링으로 새롭게 활용해 탄소 저감 숲, 빗물 이용 생태연못 등으로 조성된다고 한다. 총사업비는 242억 원으로 환경부와 서울시, 서울시교육청이 각각 7:2:1의 비율로 부담한다고 한다. 지역 주민들 처지에서는 조기축구 할 수 있는 운동장과 꽃밭을 잘 가꾸어 놓은 ‘동네의 힐링 공간’을 또 잃게 되어 아쉬움이 있다. 허준박물관과 소요정 허준박물관은 소년 허준이 뛰놀던 구암(거북바위) 남쪽 자락에 2005년 개관하였다. 소설 <동의보감>(이은성 저)과 드라마 <허준> 인기에 힘입어 1999년 10월 허준(구암)기념관 건립계획수립, 2002년 설계 당선작(공순구) 선정, 착공 3년 만인 2005년 3월에 개관하였다. 공사비 약 140억원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준박물관 옆에 2005년 5월 대한한의사협회 회관이 신축, 개관하였다. 대한한의사협회는 미국과 전국에 시도지부가 있어 3만여 명의 한의사를 대표하여 글로벌 한의학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허준박물관에서는 연2회 특별기획전과 박물관대학, 허준건강의학교실, 자원봉사 도슨트교육을 하고 있다. 청소년을 위한 학교연계 체험과 어린이를 위한 다양한 체험 활동이 있어 현장체험 활동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허준기념실에는 동굴에서 동의보감을 집필하는 장면이 입체적으로 전시되어 있는데 산허거사의 <파릉산집>에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許浚在於孔庵下漏室是洞作著浚卒爲庵(허준재어공암하누실시동작저준졸위암) <파릉산집>(산허거사 저)“허준이 누수(빗물)가 뚝뚝 흐르는 동굴암자에서 책을 저술하였으며, 또 암자에서 돌아가셨다.” (강훈덕 선생 역) 산해거사는 영조 때 인물로 추정되는데 원문을 다시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허준은 공암의 암자 아래 누실(초막)에서 지냈다, 그 동네에서 저술하다가 (허)준은 암자에서 졸(사망)하였다.” 따라서 동굴에서 저술 활동을 하다가 사망했다는 것은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설정이다. 겸재 정선의 경교명승첩 중 <공암층탑> 그림에 층탑이 보이는데 층탑의 남쪽으로 암자가 있었을 것이다. 허준은 그 암자나 근처에 누추한 집을 거처로 삼아 형식상 유배 생활 중에 <동의보감>을 저술했을 것이다. 허준 자신이 호를 구암이라고 한 것도 공암의 모양이 마치 큰 거북이 모습으로 알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추억과도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다. 공암층탑의 그림을 감상하고 사천 이병연은 다음과 같이 인생무상을 노래했다. 공암층탑(孔岩層塔)孔岩多古意(공암다고의) 一塔了洪濛(일탑료홍몽)下有滄浪水(하유창랑수) 漁歌暮影中(어가모영중)공암에는 옛 뜻 많으나, 탑 하나만 아득하구나아래에 창랑의 물이 있고, 고기잡이 노래 저녁 그림자에 잠기네 겸재 정선은 공암 일대의 풍경을 <소요정>이란 그림으로도 남겼다. 그림에는 없지만, 이곳에 심정(1471∼1531) 대감이 풍류를 즐기던 소요정이 있었을 것이다. 심정은 공암(구암)을 소요산이라고 불렀는데 소요는 장자의 <소요유> 편에 ‘세상에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경지’를 뜻한다고 한다. 허준도 이곳에서 세상 근심 잊고 무병장수하는 삶을 위한 의학 백과사전을 남긴다는 신념으로 동의보감을 저술하였을 것이다. 공암나루와 투금탄 전설 잘 꾸며놓은 허준박물관 옥상정원에 올라오면 비로소 한강과 멀리 우뚝 선 삼각산, 남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옥상정원과 구암 정상에 있는 약초원이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약초원은 <동의보감>에 나오는 약초 130여 종을 심고 잘 관리하여 훌륭한 야외학습장 기능을 하고 있다. 약초원을 내려가면 소요정 정자에서 잠깐 쉬어 갈 수 있다. 처음 만들 때는 인공으로 포석정처럼 물을 흐르게 하여 감상할 수 있게 했었는데 지금은 운영하지 않는다. 소요정을 지은 심정은 청백리 심수경의 할아버지로 소요정을 호로 삼았다. 겸재 정선이 양천현령일 때 소요정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지만, 제목을 소요정으로 붙였다. 지금 소요정의 현판 글씨는 시서화 삼절에 능해 ‘장삿갓’이라 불린 예광 장성연(1944~ 2016) 선생의 글씨이다. 공암나루 가는 길에 강서구사회적기업 ‘그라나다’가 운영하는 카페가 있다. 그라나다는 석류라는 뜻을 지닌 스페인의 도시이다. 그라나다에서 천주의 성 요한은 "사랑이란 마음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베푸는 것"이라면서 고통받는 이웃에게 박애와 환대로서 석류알과도 같은 사랑을 퍼뜨렸기에 이를 기리는 뜻에서 그라나다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곳은 지적 자폐성 장애인들의 희망 일터로써, 그라나다에 담긴 뜻처럼 장애인 친구들이 세상을 향해 차별 없는 사랑을 베풀며 소중한 꿈과 힘을 키워나가고 있는 뜻깊은 곳이다. 100% 아라비카산 원두로 직접 로스팅한 AM1012 아메리카노와 오렌지 수제 쿠키 맛을 즐길 수 있는 동네 카페다. 공암나루는 북포나루로도 불리는데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투금탄 이야기>가 전해온다. 고려말 이억년, 이조년 형제가 살았다. 길을 가던 형제는 우연히 금덩이를 주워 사이좋게 나눠 가졌다. 형제는 한강을 건너가기 위해 공암나루에서 나룻배를 탔다. 나룻배가 강 한가운데 왔을 때 갑자기 아우가 자신의 금덩이를 강에 던져버렸다. “아니, 아우야 어찌 귀한 금을 강물에 던져버렸냐? 금덩이를 볼 때마다 형이 없었으면 내가 금덩이를 다 가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못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는 형을 아끼는 마음이 금보다 더 소중합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금보다 형제애가 더 귀한 것 아니겠느냐?” 사람들은 형제의 마음에 감탄했다. 그 뒤로 공암나루 앞 강물을 ‘금을 던져버린 여울’이라는 뜻으로 투금탄이라고 불렀다. 이억년.이조년 형제 이야기의 진위를 떠나 교훈적인 이야기로 성주 이씨 집안 족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억년.이조년 형제 위로 이백년, 이천년, 이만년 세 형이 더 있었는데 모두 과거에 급제했다고 한다. 공암 아래 커다란 굴이 있는데 양천 허씨의 시조 허선문이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양천 허씨 집안에서 이곳을 ‘허가바위’(서울시문화재 제11호)로 부르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경기읍지> 성씨 조에 “허선문은 나이가 90이 넘었는데도 고려 태조(왕건)를 섬겨서 견훤을 정벌하러 갈 때 군사들을 격려한 공이 크므로 공암 촌주로 삼았다. 그래서 그 자손이 양천허씨가 되었다.” 기록에 안동권씨의 시조 권행은 허선문의 딸을 며느리로 삼았는데 권행의 아들 권인행은 허선문의 사위이다. 광주바위 전설, 믿거나 말거나(Belive or Not) 1993년에 개원한 구암공원을 지금은 허준공원으로도 부른다. 구암은 허준의 호이다. 허준공원에는 야외무대, 어린이놀이터, 허준동상, 인공호수 등 있고 규모가 꽤 커 해마다 이곳에서 허준축제가 열렸다. 2023년에 허준축제를 서울식물원에서 개최하여 이름만 허준축제였다고 가양동 주민들의 불만이 있었다. 겸재정 선의 양천팔경첩의 <소요정> 그림과 경교명승첩의 <공암층탑>에 그려있는 두 개의 바위기둥이 허준공원의 인공호수 안에 잠겨 있다. 그림은 실지 풍경보다 두 개의 바위를 크게 그렸다. 공암 아래 솟아 있는 두 개의 바위가 경기도 광주에서 떠내려온 것이라는 광주바위 전설이 있다. 옛 지도에는 공암(孔巖)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1899년 편찬된 <양천읍지> 공암진 조에孔巖津 北二里 有私渡船 東有石雙立 中在孔因以爲名(공암진 북이리 유사도선 동유석쌍립 중재공인이위명)“공암진은 (현청의)북쪽으로 2리쯤 되는데 개인이 운영하는 도선(강을 건네주는 배)이 있고, (공암진) 동쪽에 돌이 쌍으로 서 있다. (공암진은) 가운데 구멍이 있어서 이름으로 삼았다.” 역시 광주암(바위)에 관한 언급이 없다.1872년에 만든 지방지도를 살피다가 공암(孔巖)과 광제암(廣濟巖) 명칭을 발견하였다. 넓을 광(廣), 건널 제(濟) 광제는 넓은 강을 안전하게 건너게 해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백제(百濟) 국호도 건널 제자를 썼다. 백제는 백가제해(百家濟海)의 줄임말이다. 의문을 가지고 광제(廣濟)의 지명과 뜻을 찾아보았다. 충남 홍성 장곡면에 자연마을 '광제(廣濟)'마을 있다. 광제는 사람들이 유원지인 오서산에 가기 위해 넓은 냇가를 건넌다고 해서 부르게 됐다고 한다. 드넓은 한강 하류에 있는 공암나루에서 양화나루나 행주나루로 가기 전에 볼 수 있는 쌍 바위를 마을 사람들은 광제암이라 불렀을 것이다. 한자를 잘 몰랐던 마을 사람 중에는 광주바위라고 부르기도 했을 것이다. 강가에 사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손주들에게 비가 많이 왔을 때 광주에서 떠내려고 온 것이라고 말했을 수도 있다. 거기에 얘기가 보태져서 <광주바위 전설>이 생겨났다. 한강에 큰 홍수가 나 경기도 광주 지역의 양천까지 떠내려왔다. “며칠 동안 큰비가 내리더니 우리 고장의 자랑인 바위가 없어졌지 않았느냐! 여봐라! 당장 바위를 찾도록 해라.” 바위는 크고 특이한 생김새로 광주의 큰 자랑거리였다. 광주의 원님은 바위를 수소문하다 양천까지 떠내려갔다는 소식을 들었다.“우리 바위가 양천에 있다고 합니다.” “당장 양천으로 가자! 우리 바위가 양천에 온 이후 이곳 경치가 좋아졌지요? 그러니 바위값을 내야 하지 않겠소?” 마침 바위 위에서 싸리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양천 원님은 이 싸리나무로 빗자루 세 개를 매년 광주로 보냈다. 어느 날 양천 원님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매년 공들여 빗자루 만들어 보낼 이유가 무엇인고? 당장 바위를 광주로 도로 가져가라 전해라!” 그러자 광주 원님이 더 이상 바위값을 내라 하지 않았다. “할 수 없다. 그냥 가자!” 광제는 조선후기 동학사상의 대표 구호 중 하나였다.輔國安民(보국안민) 나라를 보살피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布德天下(포덕천하) 덕(동학)을 천하에 퍼트린다.廣濟蒼生(광제창생) 널리 사람들을 구제한다. 이때의 제(濟)는 ‘구제할 제’이다. 전국의 지명을 조사해보니 홍성의 광제마을 외에도 경남 진주에 광제산(廣濟山)이 있다. 광제한의원, 광제약국도 전국에 많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대한제국에서 1900년 개원한 최초의 근대식 국립병원은 광제원(廣濟院)이었다. 또 1904년 11월부터 월미도 무선전신소와 등대 순시 및 세관 감시선으로 사용했던 해군 군함의 이름이 광제함(廣濟艦)이었다. 광제함은 을사늑약 체결로 1년 만에 사명이 끝났다고 한다. 이렇게 근대 역사에 남아 있던 광제라는 이름이 일제 강점기에 만든 지도에서 빠지고 슬그머니 광주암(廣州岩)으로 바꾸었다. 공암도 탑산(塔山)으로 바꿨다. 동학농민혁명을 구실로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에 대항하여 농민군들은 끝까지 싸웠다. 조선 민중의 저항 정신의 담겨 있는 광제(廣濟)를 일제는 지도에서 지우려 한 것일까? 사람의 이름이 그 사람의 정체성이듯 지명이나 도로명도 그 지역의 역사이고 상징성이 있는 것이다. 알게 모르게 바뀌거나 바꾸어 부르는 지명을 되찾는 일은 지역공동체의 역사와 정체성을 찾는 일이다. 동양의 히포크라테스 허준의 광제(廣濟) 정신이 깃들어 있는 강서구에서부터 옛 지명 되찾기 운동이 펼쳐지기를 소망한다. 권태운종해역사문화연구소(현)종해문화진흥원 길 위의 인문학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