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다리 앞 이별 끝에 백워시와 글라시 / 김민지

굴다리 앞 이별 끝에 백워시와 글라시 크고 멋진 다리는 아니다. 그러나 귀여운 다리다. 다리다. 어쩌다 딱 떨어진 혼잣말 끝에 붙은 다리다. 그래, 다리다. 어쩐지 마음의 주름이나 구김살을 펼 수 있을 것만 같은, 그 표현을 닮은 여름 하늘. 그 위에 금방 꺼지지 않을 듯한 크림 같은 거품. 그 모양을 꼭 닮은 구름이 뜬 날이다. 동네 굴다리를 좋아한다. 위에는 기차와 지하철이 다니고 아래는 사람과 차, 오토바이, 자전거가 다니는 그 다리. 퇴근길 한 번씩 지나게 되는 그 다리 앞에서 올봄 최신 이별을 했다. 이별이라는 말은 어딘가 애잔하지만, 최신 이별이라고 하니 어딘가 신나 보이기도 해서 한동안 이 말을 쓰고 있다. 다음 사랑이 나타나고 또 이별하기까지, 한동안은 이 이별이 최신 이별이겠지. 이런 혼잣말을 속으로 굴리면서 굴다리를 자주 지난 이번 여름은 상상 이상으로 습하고 무더웠다. 제발 여름까지만이라도 이 감정을 끝내자 해서 벌인 소소한 기행들이 참 많았다. 글을 쓰는 작업은 깊게 침잠한 것들을 들여다보는 잠수의 작업이다. 마음의 물질을 할 때면 그런 생각이 든다. 먹고살 만큼 적당한 돈도 벌지 못하는 글쓰기라는 직업적 행위 때문에 수심에 뛰어드는 행동을 계속하는 게 맞나. 그냥 한 인간으로서는 충분히 버거운 반복이라 이따금 탈진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이 반복을 멈추지 못하는 것은 글쓰기만큼 내 삶을 지탱해주는 근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 이별, 최신 이별 정도는 삶이 삶으로서 건재하다는 적당한 기별일지도 모른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다는 그런 당연한 말을 글로 쓰겠다는 말이 아니다. 그냥 나는 조금 더 구질구질한 관계로 축제가 끝난 자리 바닥에 눌어붙은 꽃가루들을 쓸어내야 하는 입장일 뿐이다. 그 과정에서 유일한 보람이 있다면 누군가는 내 그 쓸데없이 성실하고 힘겨운 비질 소리에 마음이 평온해지기도 하며 잠이 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그런 평온과 잠을 돕는 책 한 권을 써서 내는 사람. 그래. 그것이면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올해는 한 권 이상의 책을 내야 하는 기이한 한 해였다. 이렇게 많은 글을 한꺼번에 쏟아내듯이 세상에 내다니. 몰리는 기분에 잠깐 틈을 내서라도 숨을 돌리고 싶어 바다를 보고 왔다. 수영은 여전히 하지 못해서 적당히 발만 담그고 오려 했으나 친구의 도움으로 물속에서 온몸에 힘을 빼는 체험을 할 수 있었다. 겁이 많아서 힘을 빼다가도 어느 한 부위 힘이 들어가 허우적거릴 때도 많았지만 내 딴엔 짠물과 최대로 친해진 하루였다. 다음날에는 친구를 따라 난생처음 서핑을 배웠다. 보드 위에서 일어서는 것은 실패했지만, 보드 위에 엎드렸다 앉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파도를 타고 나아갔고 다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재밌는 경험이었다. 다음에는 일어설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함께 바다에 간 친구는 바다 멀미가 있었다. 그럼에도 틈틈이 가지고 온 스노클링 장비를 차고 바닷속을 깊게 들여보았다. 어지럽다 하면서 좀 쉬다 다시 바다로 친구에게 물었다. “어떻게 바다 멀미가 있는데도 그렇게 들어갈 수 있어?” “나는 물놀이가 좋으니까” 몸에 힘을 빼고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친구가, 바다에 얼굴을 파묻은 친구가 잘 자란 어른처럼 느껴졌다. 그 명쾌한 답변이 좋았다. 좋으니까 감당할 수 있는 거다. 그럼에도 좋은 것이 있는 삶.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싶어서 지난 사랑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 이별. 이 이별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감당하고 있다. 나는 사랑이 좋으니까. 이런 단순한 해답을 안고 돌아온 밤에 다시 시를 쓸 마음이 차올랐다. 달도 어느 한쪽으로 기운 채 차올라 있었다. 아마도 그 시를 다 썼을 때는 굴다리 위 만월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달을 보면서 걷는 저녁은 좀 낫다. 때때로 높은 산등성이, 건물에 잠시 보이지 않던 달이 다시 등장해서 나란히 걷는 어두운 시간이 좋다. 6년 전 여름에 냈던 다섯 번째 비정기 상념지 /뭔가/의 주제는 연애 열애였다. 두 가지 관념어를 주제로 내던 그 시리즈에 드물게 사랑을 끌고 온 것은 내 삶에 부족한 것이 사랑과 믿음이라 느꼈기 때문인데. 누구나의 삶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자주 부족하다고 느낄 만큼 충분하면 좋은 것. 그 책 맨 뒷장에 실었던 글을 다시 옮겨 적는다. “마음을 앞서가도 저 멀리 있을 것만 같던 사람이 어느 날 저녁에 보았던 달처럼 나와 동행할 때가 있어요. 사실은 그게 아니어도 오늘은 그렇다 믿어보려고요. 어느 순간 바라보고 있던 사람을 사랑이라 믿고 가려고요.” 이 글을 다시 옮겨 적는 지금 그 사랑과 믿음을 실현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그런 과정이다. 이듬해 가을에 내는 시집과 산문집에 그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떠한 휴지기 없이 끊어진 설렘에 다른 설렘을 곧바로 이어가는 방식은 나와 맞지 않는다는 걸 배웠다. 떠나간 사람과 달리 나는 나만의 속도로 패들링을 해야 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안다. 바다에서 부서진 파도와 해안에서 되돌아오는 파도가 부딪치는 상태. 서핑용어로 말하자면 백워시 같은 시간이다.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글라시. 바람이 없고 파도가 거울처럼 매끄러워 서핑하기에 적합한 시간이 올 것이다. 사랑하기 좋은 시간이 오고 있다. 김민지something.text@gmail.com제1회 〈계간 파란〉 신인상에 시 「top note」 외 9편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시집 『잠든 사람과의 통화』와 에세이 『마음 단어 수집』 『시끄러운 건 인간들뿐』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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