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 운영의 기승전결 올 래來 , 빛날 경炅내 이름이다. 풀이하자면 ‘빛이 온다’는 뜻이다. 세상에나. 의미 한 번 거창하다. 이름에 어울리는 삶을 살자면 거의 성인의 반열에 들어야 할 것이다. 빛이 어쩌고 하는 수사는 창세기에 쓰였으면 충분하지 않나. 어둠을 걷어낼 사람이라니. 네? 제가요?난 늘 내 이름에 유감이 많다. 실제로 몇 번인가 개명을 시도하기도 했다. 굴곡 없이 살기를 희망하는 입장에서, 이름에 담긴 어마한 뜻만 생각하면 무언가에 깔린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다. 발음이 어렵다는 문제도 있고.그런데 지금의 나는 정말로 어둠을 거두는 사람이 됐다. 칠흑 같은 상영실에 한 줄기 빛을 올리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이름 따라간다지만 이렇게까지야. 어쩌면 할아버지께선 작명소가 아니라 점집에 다녀온 게 아닐까…. 나는 여전히 창작 생활을 하고 있다. 이야기를 만들며 늘 기승전결이 확실한 글을 쓰려 하지만, 발상이 이리저리 튀는 바람에 어그러지고 마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좋은 기회를 받은 김에 자체휴강시네마(이하 자휴시)의 뒤를 되짚어보고 앞을 살펴보려 한다. 가능한 한 기승전결이 또렷하게. 난 문예창작학과를 나왔다. 계속 소설을 써 오다가 책보다 영화를 많이 보는 자신을 발견하고선 시나리오 집필로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쓰다 보니 만들고 싶어졌고 자연스레 단편영화를 접했다. 처음부터 장편을 찍지는 않으므로.그런데, 이럴 수가. 너무 좋은 작품들이 많은 거다. 나름 영화깨나 봤다고 생각했는데 여태 왜 이 세계를 몰랐나. 억울하면서 한편으론 화가 났다. 영화제에 발품을 팔지 않으면 접할 구석이 없다는 게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물에 떨어진 한 방울 잉크처럼 또 다른 생각으로 번졌다. 단편영화 전용관이 있으면 나도 좋고 관객들도 좋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살던 원룸 보증금을 뺀 후였다. 영화관 설립 계획을 실제로 옮기는 데는 지금은 폐관한 이태원의 ‘극장판’과 춘천의 ‘일시정지시네마’에서 많은 피드백을 받았다. 정리하자면, 자휴시는 홧김에 만들어졌다는 거다. 7년 전, 처음 자리 잡은 곳은 흔히 고시촌이라고 부르는 대학동 입구 어귀의 작은 지하 공간이었다. 집 구할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한동안 공사장에서 지냈다. 연말이었고 눈이 많이 내렸다. 나이가 서른도 넘어선 처지가 퍽 한심했다. 자괴에 빠져선 오그라든 발을 서로 문대던 기억이 생생하다. 텅 빈 스크린 위에 세상에 없는 영화들을 그려보다 잠이 들었더랬다.서울대학교가 인근에 있다는 점을 고려해 캠퍼스에서만 쓰는 용어로 극장 이름을 짓기로 했다. 쉰다는 의미를 담아 ‘휴강’, 여기에 기왕 쉴 거 스스로 쉰다는 의미를 얹어 ‘자체휴강’이라는 이름을 뚝딱 지었고(한 1분 걸렸나) 고민 없이 간판을 주문해 내걸었다.고생 끝에 공간이 완성됐으나 막상 단편영화를 어떻게 구하는지 몰랐다. 다행히 위에서 언급한 두 극장의 도움으로 ‘인디스토리’, ‘필름다빈’, ‘센트럴파크’ 등 단편영화 배급사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다짜고짜 전화를 걸었고 영화를 받아올 수 있었다. 그때의 인연은 아직도 이어오고 있다. 대표님들의 배려엔 늘 감사할 뿐이다. 상영을 계속해나가자 다양한 인연들이 거미줄처럼 엮였다. 영화제, 상영회, 배우전, 교육사업 등 단편영화를 매개로 한 많은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활동을 진행하는 열의 넘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소중한 지면을 내어준 ‘강서 N개의 서울’도 이러한 인연 중 하나다. 자휴시는 그들에게 장소를 제공하며 성장(일지 유지일지)해 왔다. 이렇게 협업이 이루어지는 때가 운영자로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다. 지금까지 운영을 지속할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기도 하다.그리고 영화인들을 만났다. 감독, 배우, 스탭 등 필드에서 일하고 있거나 미래에 일하기를 꿈꾸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좋은 작품을 보여주고 영감을 제공하는 것처럼 기쁜 일은 없다. 개중엔 고등학생일 때 만난 관객이 영화과에 진학해 자신의 작품을 들고 다시 찾는 경우도 있다. 그들의 영화를 함께 보며 느낀 벅찬 감정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바로 옆 블록에 큰 공사가 진행되면서 그렇잖아도 낡은 건물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손상을 입었다. 도저히 만족스러운 상영 컨디션을 유지할 수 없었고 결국 3년 만에 이사를 하기로 했다. 낙성대역 안쪽. 현재의 위치다. 접근성이 좋진 않지만 널찍하고 층고가 높아서 극장이 들어서기엔 제격이었다. 이제 단편은 물론 장편도 상영하고 단체 관객도 모실 수 있겠다며 희망에 부풀었다.하지만 어림도 없지. 막 이사를 마친 다음 날 국내에 첫 코로나 환자가 나오면서 그간 그려왔던 청사진은 시작부터 어그러졌다. 거기에 가정사와 개인사까지 겹쳐 참 힘든 시기를 보냈다. 돌이켜보면 ‘결’에 어울리는 순간. 그러니까 이 일을 멈추었어도 괜찮은때였지 싶다. 오기로 버텨냈던 게 나라는 한 개인에게 과연 옳은 선택이었는지는… 솔직히 확신이 서질 않는다. 볼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어디서든 주머니에서 꺼내 손짓 몇 번이면 원하는 영상을 접할 수 있다. 가격도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그에 비하면 영화관은 참 불합리한 공간이다. 사람을 가둬놓고 시작부터 크레딧까지 취향 불문 관람을 강제한다. 거기엔 스킵도 일시정지도 빨리감기도 없다.어쩌면 영화관의 가장 큰 매력은 이 폐쇄성에서 오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외부와의 관계를 일체 단절하고 잠시 다른 세계로 온전히 자신을 옮겨놓는 것. 아직 영화관(과 무대)에서밖에 할 수 없는 경험이다. 이 자발적 구류가 주는 매력을 빼앗기는 순간 영화관은 마침내 존재할 이유를 잃고 사라질 것이다. 처음 문을 열며, 절대 이 일에 사명감을 품지 말자고 다짐했다. 나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며 고집을 부리다 끝내 불행해지는 이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다짐은 여전히 유효하다. 더는 사람들이 내 공간을 필요치 않게 되거나, 모종의 이유로 스스로 동력을 잃게 된다면 기승전-‘결’의 때가 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를 담담히 받아들이려 한다.여기서 한 명대사를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하겠다. 영화관 운영자답게. “...But it is not this day.”모르도르의 검은 문 앞에서, 아라곤. 박래경자체휴강시네마 운영자. 영화를 틀고 관련한 행사를 기획한다.3편의 단편영화를 연출했으나 여전히 감독이라는 호칭을 어색해한다.쿨타임이 차면 한강에서 자전거를 탄다. 쌀국수 사주면 좋아한다.SNS : @huegangHOME : hueg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