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웠을 때엔 / 운

영화로웠을 때엔 오랜만입니다 방방. 혹시 보신 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방방이라는 소식지가 만들어졌을 초기에 원고를 썼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같은 대학교 영화과를 졸업한 동기인 M, 신록과 디자이너가 된 중학교 동창 지구와 함께 넷이서 '스크린 고스트'라는 이름으로 영화를 만들거나 독립영화 상영회를 여는 등의 일들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방방에 기고한 글도 그때 저희가 운영하고 있던 '필름돈니드머니'라는 단편영화 채널을 홍보하기 위해서였어요. '필름돈니드머니'라.. 고작 몇 년 지난 일이지만 지금이라면 생각해 내지 못할 이름인 것 같습니다. 아주 직관적이네요. '필름돈니드머니'는 이름 그대로 [돈 없이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마!]라는 생각으로 무일푼 무인력 1인 영화를 만들어 올리는 채널이었습니다. 필돈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니 막연한 부채감이 듭니다. 적어도 일 년은 해보자고 시작한 프로젝트는 정말 일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이어졌고, 상영회도 하고 시나리오 집도 냈지만 잠깐 쉬었다 돌아온다는 공지를 남긴 채로 멈춰버렸거든요. 누군가는 예상했던 결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끝날 줄은 몰랐는데 다시 시작하질 못했네요. 그동안 저희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스크린 고스트가 사라진 건 아니지만 우리의 작업실은 사라졌고 지금은 각자의 자리에서 일을 하고 있어요. M은 광고 프로덕션에 조감독으로 취직해서 매일매일 야근과 추가 업무에 시달리고 있고, 저는 원래 하던 영화와 드라마 편집을, 지구는 여전히 디자인을, 신록은 우리가 있던 자리에 유일하게 남아 문화 예술 기획자와 교육을 병행하며 일하고 있습니다. 궁금하지도 않을 우리의 전사를 왜 이리 길게 설명했느냐 하면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를 말하자면 알아야 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신록이 같이 새로운 일을 하자고 해주어서, 오랜만에 우리의 작업실이었던 곳에 가 신록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저를 보자마자 글쎄 뭐라는 줄 아십니까. 나 영화 찍고 싶어. 랍니다. 저는 그 말을 듣자마자 그만 소리를 질러버리고 말았습니다. 악. 사실 신록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M도 그랬습니다. 내가 분명히 기억하는데.. 하 그놈의 영화만 안 찍었으면 지금 이러고 살지 않았을 거라고 했으면서, 다음 날엔 또 미팅을 하다가 어떤 배우와 친해졌다고, 그 배우와 뭔가 찍어봐야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제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소리를 질러 버린 것도 이해되는 일 아닐까요. 누구라곤 말을 안 하겠지만 영화를 만드느라 생긴 빚을 갚으려고 청약을 깼다면서, 졸업 영화를 찍고 나서 몇 달을 집 밖에도 못 나가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면서, 영화를 만들 때마다 통장의 빚도 지고, 마음의 빚도 지는 모습들을 십 년이 가까워지는 세월 동안 가장 가까이서 몇 번이고 지켜봤던 저에게 그 말은 마치 끊임없이 반복되는.. 뭐랄까.. 아닙니다. 상처받을까 봐 비유는 하지 않겠습니다. 영화를 만드는 일은 참 어렵습니다. 너무 많은 파트의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고, 그 사람들이 하나같이 다 예민하고, 성격이 구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하나의 결과물을 만드는 일이어서 부딪힐 일도, 상처받을 일도 많습니다. 작품마다 일어나는 갈등들이 그리 첨예하게 다르지도 않아서, 매번 같은 이유로 부딪히고 같은 내용의 언쟁을 벌이고 있자면, 혹은 그런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면, 정말 지겹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한 글자로 줄이자면 또!!! 다섯 글자로 줄이자면 또 지랄이야. 하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영화를 만드는 일은 참 이상합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요. 대부분의 경우에 연출이 아닌 스탭의 역할을 맡아 온 입장에서 조금 떨어져 보고 있자면.. 영화감독이란 놈들은 참 왜 저러나 싶어요. 영화를 만드는 동안에는 그렇게나 사람을 미워하고 분노에 가득 차 있으면서, 푹 익힌 나물 같은 얼굴에 떡진 머리를 하고 후회하고 또 후회하면서, 영화가 끝나는 순간부터, 드디어 끝났다 싶은 바로 그때! 어젯밤에 떠올린 다음 영화의 시놉시스를 읊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면.. 다시 그 생각이 들고 마는 것입니다. 또 지랄이야. 왠지 시니컬한 투로 글을 쓰고 있지만 사실 저도 꽤나 지랄을 즐겨 하는 편이긴 합니다. 좋아하는 글을 오랜만에 봤는데, 새삼 어떤 단어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어떤 글이었냐면.. "영화로웠을 때엔, 도취되거나 계속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딱 하룻밤, 나의 영화를 기뻐하는 벗들과 먹고 마시고 더는 내 것이라 생각 않고 보냈다." ..어떤 단어가 눈에 들어왔는지 아시겠죠? 영화롭다는 말을 처음 안 것도 아닌데 괜히 그 문장에서 멈춰 서게 됐습니다. 그리고 검색창에 들어가 검색을 해봤습니다. 영화롭다 ; 몸이 귀하게 되어 이름이 세상에 빛날 만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더 솔직하자면 조금 벅차올랐던 것도 같습니다. 영화라는 단어에, 영화로운이라는 표현에 어쩜 그런 뜻이…. 그래서 조용히 국어사전 화면을 캡쳐하고 하트를 눌러뒀어요. 모든 행동은 아주 비밀스러웠습니다. 주변인들에게 영화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들킨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거든요. 그 캡쳐를 간직한 채 침대에 누워 잠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영화 찍고 싶다.. 그리고 M과 신록을 떠올렸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엠피쓰리에 넣어 놓고 음악처럼 돌려 들었던 영화가 있습니다. <투 올드 힙합키드>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인데, 남들은 취업 준비할 시기에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 꿈이 생긴 감독이 학창 시절 같이 랩을 했던 형들을 한 명씩 찾아가는 내용입니다. 그 영화에서 이제는 랩을 그만두고 금융회사에 다니는 한 사람이 인터뷰 중 이런 말을 합니다. 힙합은 단순히 음악을 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이자 삶의 방식이자 태도라고. 내가 지금 회사에 다니고 일을 하더라도 그 일에 임하는 마인드가 힙합.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기죽지 않고 당당히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것. 비겁하게 굴지 않는 것이 힙합. 정치질 하지 않고 실력으로 멋지게 승부하는 것이 힙합. 멋진 말이네요.. 저는 멋진 것을 좋아하니까 이 말을 베껴 M과 신록에게 해주고 싶습니다. 꿈과 다른 일을 하면서 친해진 배우들과 무엇이라도 만들어 봐야겠다 마음먹는 것이 영화.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하며 그림을 그리고 종이박스를 꾸미는 것도 영화. 마음이 가무는 때가 있더라도 못된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이 영화. 충분히 영화. 그러니까 조급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랜 독립영화 오타쿠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당신들의 삶은 진짜로 독립영화 주인공들의 삶과 비슷하기도 합니다. 성공한 영화감독보다는 영화하는 백수들이 독립영화에선 언제나 더 매력적인 주인공이거든요. 이것을 바라는 건진 모르겠지만.. 저는 십 대 때부터 이런 삶을 바랐던 것이 맞으므로 사실 만족하며, 이 불안정함과 미래 없음과 벌이에 대한 압박을 꽤나 즐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루하진 않잖아요. 아무튼 뭐.. 지긋지긋하긴 해도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으면 좋겠네요. 영원하진 않더라도 당분간은 그렇게 철은 없지만 하고 싶은 것은 있는 모습이었으면 합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계속해서 질린다는 표정을 짓고 소리를 지를 테지만 뭐 어차피 제 호응을 바라고 한 말도 아닐 테니까요. 그래도 우리의 얼마 남지 않은 젊은 날에, 당신들의 영화로웠을 때에 함께할 수 있어서 꽤 재밌습니다. 재밌는 거 좋잖아요. 없는 반찬이나마 먹고 마시며 영화로웁시다. 화이팅. ps. 그래도 더 이상의 빚은 안 돼요. 그럼 남은 날이 재미 없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진짜 화이팅. 운더 늙기 전에 영화로 할 수 있는 거 다 해본 다음 편집으로 먹고 살고 싶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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