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 사또길강서양천을 사랑한 사또, 겸재 정선 (2)-두 노선비의 아름다운 우정이야기- 경교명승첩, 천금을 주어도 바꾸지 말라.정선은 이병연과 약속한 대로 65세의 나이를 잊은 채 틈만 나면 한강을 유람하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겸재 정선이 양천현령으로 부임했을 때는 이병연의 나이는 70세가 넘은 고령이었다. <시화환상간>은 사천과 겸재의 젊은 날을 그림과 시로 회상하며 남긴 “두 노인의 아름다운 우정이야기”이다. 아들에게 천금을 주어도 바꾸지 말라고 당부하였으나 아들 정만수는 당시 노론 벽파의 영수였던 심환지에게 <경교명승첩>(보물1950호)뿐만 아니라 <인왕제색도>(국보216호)도 넘겨주었다.겸재정선사또길은 양천향교역 1번 출구에서 시작한다. 왜 양천향교와 양천초등학교가 양천구가 아니라 강서구에 있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고구려의 제차파의현을 통일신라 경덕왕 때 공암현으로 고쳤고, 고려 충선왕때부터 양천현으로 불렀다.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내려오다가 1895년 양천군으로 승격되었으며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경기 김포군에 흡수되었다.김포군에 속했던 양천지역은 1963년 서울시 영등포구로 편입되었다. 인구가 늘면서 1965년 독립할 때 이름을 강서구로 정했다. 그 후 목동신시가지가 생기고 인구가 더 늘어나면서 1988년 목동, 신정동, 신월동을 떼어 구를 나눌 때 이름을 되찾아 양천구가 된 것이다.하마비는 서원이나 향교의 홍살문 앞에 세우는 비석으로 말이나 가마에서 내리라는 표시이다. 하마비에는 대개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고 쓰여 있는데 여기서 인은 관직이 없는 사람이고 원은 관직이 있는 사람을 뜻한다. 가까이에 양천향교가 있다. 양천현은 읍치의 삼요소인 현청 (종해헌), 객사(파릉관), 향교(양천향교)를 갖춘 현이었다.양천초등학교는 1900년 2월 15일 경기도 양천군 양동면 가양리에 4년제 공립 양천소학교로 설립되었다. 1907년 양천공립보통학교로 개칭하였다. 1913년 4년제 제1회 졸업생 15명을 배출하였으며, 당시 전교생은 94명이었다. 1941년 양천공립국민학교로 부르다가 1963년 서울특별시로 편입되면서 교명을 서울양천국민학교로 변경하였다. 강서, 양천지역의 모든 초등학교는 양천초등학교에서 분교되었다.정선은 양천현령으로 있으면서 이병연과 그림과 시로 교류하였는데, <목멱조돈>, <양화환도>, <안현석봉>, <공암층탑>, <소악후월>, <종해청조>, <금성평사>, <행호관어>, <설평기려>, <빙천부신> 이다. 겸재정선미술관에는 원화뿐만 아니라 겸재정선의 모든 그림의 영인본을 전시하고 있어서 언제든지 감상할 수 있다. 겸재정선미술관에는 어린이체험관과 프로그램실, 전시실이 있어 수로로 중견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마곡동 출신의 화가로 김종태가 있다. 대표작은 <노란저고리>(1929, 국립현대미술관)이다.2.8공원은 상산 김도연 선생의 흉상이 있는 곳이다. 김도연 선생은 지금의 강서구 염창동(옛 김포군 양동면) 출신 인물로 도쿄 유학시절 2.8독립선언을 낭독한 독립유공자이며 이승만 정부에서 재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김도연 선생은 공직을 수행하면서 사귀정직(事貴正直:일을 하는 데 있어 정직하게 하는 것이 좋다.)을 신념으로 삼았다. 인근에 변전소가 있어서 마을버스 정류장 이름이 <변전소>였는 주민들의 노력으로 <2.8공원>으로 바뀌었다. 2.8공원에는 일문오열비가 있는데 병자호란때 충절을 지킨 황씨 집안의 5열을 기리기 위하여 가양1동 주민들이 세운 것이다. 2.8공원 건너편 마곡신도시에는 서울식물원이 들어서 있고, 그 안에 있던 구 양천수리조합 배수펌프장(등록문화재 제 363호)을 복원하여 마곡문화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에에 건립된 ‘서울 구 양천수리조합 배수펌프장(마곡문화관)’은 한국 근대 산업 문화유산 중 원형이 남아 있는 건축물이다.강서평화소녀상은 3년간 강서양천환경 운동연합, 강서양천여성의전화 등 강서구의 많은 시민사회단체가 모금으로 건립하였다. 김서경·김윤성 부부 조각가의 작품으로 2019년 당시 강서유수지공원에 세웠는데 언제부터인가 어울림공원으로 부르고 있다. 강서평화소녀상 설치 장소를 정할 때 화곡역 쌈지공원, 발산역 가로공원 등이 후보 지역으로 거론되었으나 양천향교역에서 겸재정선미술관, 양천고성지, 양천향교 등을 연결하는 강서역사문화거리를 조성 하고 장기적으로 서울식물원과 생태환경코스로 연결하는 강서역사문화공원이나 강서평화공원 추진을 염두에 두고 이곳에 설치하게 되었다. 특히 강서구에 사시다가 돌아가시면서 전 재산을 강서구장학회에 기증한 황금자 할머니 상을 함께 세웠다. 황금자 할머니는 13살 때 길을 가다 일본 순사에게 붙잡혀 흥남의 한 유리공장으로 끌려갔다가 3년 뒤 다시 간도로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 로 생활했다고 한다. 강서구에 12분의 위안부 할머니가 사셨다.강서양천여성의전화 단체가 중심이 되어 위안부 기림일 행사를 여러 차례 진행하였고, 평화소녀상 주변의 청소와 꽃 심기 행사 등을 해왔다.궁산(관산)땅굴과 관산성황사2009년 발견된 궁산땅굴은 일제강점기에 마을 주민들을 동원하여 만든 양천고성지 대피시설이다. 가까이에 일본군 비행훈련소(지금의 김포공항)가 있었고, 한강을 지키는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일제 패망 후에는 오랫동안 미군이 주둔하였다. 미군이 궁산에 헬기장이나 막사를 지으면서 산의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다. 궁산에 있었던 성황사나 사직단 등이 관리 소홀로 유실되었다. 옛 지도나 기록에는 궁산이 아니라 성터가 남아 있어 성산(城山), 양천현의 주산(主山), 생긴 모양이 뱀이 똬리를 튼 모양이라 파산(巴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곳에 태어나서부터 살고 있는 주민들은 궁산이 아니라 관산(關山)으로 불렀다고 한다. 관산성황사에서도 산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양천고성지를 발굴 조사하고 기록하는 과정에서 행정착오로 궁산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관(關)은 빗장이라는 뜻인데 이곳과 행주나루를 연결하면 한강을 감시하고 빗장처럼 통행을 관리 할 수 있어서 관산이라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서남해의 모든 조운은 이곳을 지나야 하므로 물류에 매우 중요한 통로나 기지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소금 창고인 염창 (鹽倉)이 있어서 염창동이 유래한 것만 봐도 짐작이 간다.소악루 한강 유람선 1994년 5월 강서구청에서 궁산에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건물을 짓고 소악루라 하였다. 건물은 정면 3칸·측면 2칸의 규모로서 지붕은 단층 팔작지붕이며, 주위에는 난간을 둘러놓았다. 동복현감을 지낸 이유(1675~1757)는 정종의 제4왕자인 이무생의 9대손이다. 동복은 전라남도 화순이다. 그의 5대조부 이준도는 율곡 이이와 절친이었다고 한다. 이유의 증조부 이명운은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위하려고 하자 벼슬을 버리고 양천으로 물러 나와 살게 되었는데 궁산 기슭에 악양루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이유는 악양루 터에 다시 정자를 짓고 작은 악양루라는 의미에서 소악루라 하였는데 자신의 호로 삼기도 하였다. 지금도 가양동에 이유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이유가 장릉 참봉이던 57세 때, 영월 땅을 지나면서 불행했던 단종을 생각하고 지었다는 시조가 김수장의 『해동가요』에 전한다. 이유의 문장을 가늠할 할 수 있는 작품이다.자규(子規)야 우지 말아 울어도 속졀업다.울거든 너만 우지 날은 어이 울리는다.암아도 네 솔의 들을 제면 가슴 알파 하노라.동복현감을 지내고 고향으로 돌아온 이유는 양천현령으로 부임한 겸재 정선과 다시 만나 한 때 소악루에서 즐기던 풍류를 떠올렸을 것이다.겸재 정선은 소악루에서 이유와 함께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들으며 달이 뜨기를 기다리다 마침내 <소악후월>을 그려낸다. 겸재 정선은 <소악후월>을 인왕산 자락에서 자신의 그림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사천 이병연에게 보냈다.소악후월(小岳候月) 소악루에서 달을 기다리다파릉(양천)에 밝은 달 뜨면 이 난간머리를 먼저 비추네.두보의 시구에 없는 것은 끝내 소악루뿐이리라.巴陵明月出(파릉명월출)先照此欄頭(선조차난두)杜甫無題句(두보무제구)終爲小岳樓(종위소악루)<양천향교지>선정비 양천향교지는 서울특별시기념물 8호로 1411년(태종 11)년에 창건되었다. 향교는 지방의 국립중등교육기관으로 현마다 향교를 설치하였다. 한성에는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성균관이 있고, 한성5부에는 중등교육기관으로 각각 학당을 설치하였다.양천이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양천에 설치되었던 양천향교가 서울시 강서구에 있는 것이다. 지하철 9호선 양천향교역도 당연히 강서구 가양동에 있다. 양천향교는 전국의 234개 향교 중 서울에 있는 유일한 향교인 셈이다.향교의 교육과목은 육예이다.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로 예는 예용, 악은 음악, 사는 궁술(활쏘기), 어는 마술(말타기), 서는 서도, 수는 수학이다. 현재 양천향교에서는 대성전에 오성과 송조 4현, 그리고 우리나라 18현과 함께 27인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에 석전(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을 봉행한다. 양천향교 앞에 있는 선정비들은 강서구 개발과정에서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강서구에서 겸재정선사또길을 탐방하는 것은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따라 280여년 전으로 떠나는 시간여행이다.권태운종해역사문화연구소 소장(현)종해문화진흥원 이사장(전)길위의 인문학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