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경리단! 나의 경리단! / 서현범

오 경리단! 나의 경리단!​ 오래 산 동네는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람 같다. 한동네에 오래 살다 보면 그 동네를 구석구석 알게 되듯이, 한 사람을 오래 알고 지내다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이나 취향을 알게 된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언제고 변할 수 있으므로, 그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보면 예전에 알던 모습과는 또 다른 모습일 때가 왕왕 있다. 동네도 마찬가지다. 한적한 동네라면 비교적 변화가 적을 수 있지만, 번화가일수록 변화의 속도가 빠르다. 오랜만에 방문한 옛 동네에서 단골집이 없어졌다거나 하는 일이 제법 흔한 일이라, 이제는 그리 놀랍지 않은 것처럼.​초등학교 동창 중에 허구한 날 모여 놀던 친구가 하나 있다. 그 친구는 특이하게도 자기 귓불을 엄지와 검지로 비벼대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 덕에 귓불에 항상 딱지가 앉아 있었다. 3학년 땐가, 갑자기 그 친구가 전학을 가버려 연락이 뚝 끊겼다. 당시에는 핸드폰도 귀했고, 인스타그램도 없었으니 그 친구와 연락할 방도가 전혀 없었다.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동네를 거닐다 누군가 반갑게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내 뒤엔 모르는 사내가 서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귓불에 딱지가 진 모습에 나는 이 사내가 그 친구임을 알 수 있었다.​경리단은 왜 경리단일까. 경리단은 녹사평역에서 하얏트 호텔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는 군부대 이름이다. 그러니까 경리단은 애초에 동네 이름이 아니며, 경리단이라 불리는 동네의 이름은 ‘이태원 2동’이다. 하지만, 이제 경리단을 이태원 2동이라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심지어 경리단이라는 부대도 이제는 없는데 말이다 (현재는 육군 재정 관리단으로 개명했다).​2000년대까지의 경리단은 서울 한복판에 있는 동네라 믿기 어려웠다. 아파트보다 흙벽, 기와지붕의 한옥을 보기가 쉬웠다. 양변기 대신 요강이나 푸세식 화장실이, 보일러 대신 아궁이가 내겐 익숙했다. 차도보다 골목이 더 많고, 평지보다 언덕이 더 많으니 사실 달동네라 부르기에도 어색함이 없었다. 골목이나 언덕이 많다는 점에서는 현재의 경리단과 비슷해 보이나, 그것만 빼면 경리단은 2010년대에 들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2011년, UV의 <이태원 프리덤>이라는 노래가 나오며 이태원이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정확히는 이태원역 부근에서부터 녹사평역까지의 이태원 1동이 확 떴다. 이전의 이태원은 힙합 문화를 좋아하는 몇몇 마니아층이 찾는 마이너한 동네였는데, UV 이후로 이태원은 강남, 홍대, 신촌을 넘어 “모두 모여 이태원”이 되었다. 그 부흥의 물결이 범람하여 인접한 동네들도 덩달아 흥했다. 한남동이나 해방촌. 그리고 이태원 2동, 그러니까 경리단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이등병이었던 나는 생활관에서 <이태원 프리덤> 뮤직비디오에 배경으로 나온 이태원의 모습을 보며 고향을, 정확히는 사회를 그리워했다. 행정반에선 경리단 부대 홈페이지에 접속하고 부대 사진 뒤로 얼핏 보이는 경리단의 모습을 보며 향수병에 잠기다 선임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기도 했다.​하지만, 2010년 후반이 되자 경리단은 소위 말해서 ‘거품이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예전처럼 유동 인구가 많지는 않았지만, 집값은 여전히 높아서 공실이 많아졌다. 나보다 동네에 오래 산 가게들이 빠지는 거품에 휩쓸리듯 없어지기도 했다. 나는 한 동네의 흥망성쇠를 모두 겪어본 자가 되었다. 흥할 때의 경리단을 보면서는 예전의 한적한 경리단을 그리워했지만, 쇠한 경리단을 보고 있자니 차라리 흥할 적이 나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럴 거면 잘되지를 말지, 잘될 거면 망하지나 말지.​경리단에서 나고 자라 30년을 넘게 살다가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간다. 13년을 키우다 죽은 강아지를 묻은 앞마당이나 첫사랑과 첫 키스를 했던 공원, 처음 알바했던 가게나 친구들과 자주 모여 놀던 정자들을 모두 두고 떠난다. 평생을 경리단에서만 살고 싶다고도 생각했었는데, 그건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떠나는 길에는 ‘언젠간 다시 돌아올게’라며 혼자 다짐 같은 약속을 했다.​언젠가 다시 만날 경리단은 어떤 모습일까. 어쩌면 그때의 경리단은 경리단이라 불리지 않고, 국군재정관리단이라 불릴지도 모른다. 혹은 몇 차례의 흥망을 더 겪을 수도 있다. 그 결과 내가 돌아가는 날에 동네가 성할지, 쇠할지는 모르겠다. 강아지를 묻은 마당이나 첫 키스를 했던 공원, 첫 월급 받은 가게와 모여 놀던 정자가 모두 없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옛친구 귓불에 앉은 딱지처럼 익숙한 골목 어귀 정도만 있다면 언제 떠난 적이 있냐는 듯, 내게는 30년 전의 경리단일 것이다. 그러니까 딱 그 정도만 그대로 있어 주길 바란다. 언젠가 다시 만날 때까지. 경리단을 떠나며, <죽은 시인의 사회> 속 한 장면처럼. 오 경리단! 나의 경리단!​​서현범글밥 짓는 서현범입니다.​https://www.instagram.com/s.seohyunb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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