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한 병 #1. 커피와 물병, 소주병이 있는 테이블. 아름과 A. 첫 번째 잔을 주고받는다. A: 여기 오랜만이다.아름: 그러게, 여전하다. 그리웠어. 된장찌개, 커피.A: 아직도 그때 극장 가?아름: 어디? 스폰지하우스? 중앙극장? 선재? 다 없어졌지. 옛날 일이야. 주말마다 참 열심히 다녔어. 영화 보러 나가면 엄마가 "영화 못 보고 죽은 귀신 씌었냐"고 매번! 꼭! 말했는데. 지금은 영화도 잘 안 봐. OTT 본다, 야 ㅎㅎ사장님이 테이블 위에 된장찌개와 버터간장계란밥, 반찬 몇 가지를 내려둔다.아름: 아, 가끔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무인도에 영화 3편 가져갈 수 있다면?"이란 질문 하잖아. 그때 얘기하는 영화들 다 그 극장에서 봤는데. (소주를 마시며 살짝 웃는다.) 지금 내 취향 지분의 대부분은 그 극장 때문? 덕분이지. 뭐 나도 극장에 잘 안 가면서 없어졌다고 툴툴거리는 것도 웃기긴 하다.테이블 유리 아래 언제부터 쌓여 있었을지 모를 입장권, 외화, 영화표, 사진 등을 지나 가게 곳곳을 바라본다. 시선의 끝에 CD가 잔뜩 장식된 오디오 옆 꽃다발이 있다.아름: 그땐 극장에 있는 시간표 종이 챙겨 다니면서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봤는데. 좋으면, 어려워서 다시 본 게 많지만 어쨌든, 또 보고, 한참 장면 장면 생각하면서 주인공에게 편지도 쓰고, 악역 때문에 화도 내고, 버스에서 가끔 울기도 했다? 고민, 공상이 많은 시기였거든. 한참 아주 먼 미래의 일로 우울해하고 걱정하는. 영화 속에 막 나처럼 고민하고 우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소리 지르고, 훌쩍 떠나기도 하고, 뭘 막 부수고, 법도 어기고 난 절대 못 할 것 같은 기행들을 하는 걸 보면서 만족이 되는 거지? 만족감 속에서 난 저러면 안 되겠다 생각도 하고. 덕분에 안전한 20대를 보냈다고 해야 하나. 답을 얻었던 건 아니었어. 그냥 극장에선. 영화를 보면서. 마음껏 고민할 수 있었나 봐. 안전하다고 느꼈고, 그랬던 것 같아. 그곳이 없어져서 그래서 쓸쓸했나 봐.아름과 A, 남은 술잔을 비운다. #2. 오래된 호프집. 비어있는 생맥주잔과 안주 그릇이 보인다. 아름과 B. 두 번째 소주잔을 주고받는다. B: 아니. 여기 포차 골목 싹 없어졌더라, 완전 우리 아지트였는데. 주방장 모자 쓴 사장님 아직도 기억난다.아름: 기억 안 나? 낮술 하러 왔다가 그 앞에서 사장님들 투쟁하는 거 보고 엄청 속상해했잖아. 안 없어질 줄 알았는데..B: 거기 다른 사람들이랑도 많이 갔는데, 아쉽네..북적북적한 종로의 포장마차 골목, 플라스틱 의자와 테이블,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춘다. 아름: (소주를 마시며) 그 사장님 덕분에 나 이제 굴도 먹잖아! 사람 좋은 미소로 서비스라고 주시는데 못 먹어도 먹어야지 ㅎㅎ 더워도 추워도 다 참고 먹고 마시고 떠들었어. 요즘은 그때처럼 마냥 좋아하는 공간이 없어. 조금 정 붙는다 싶으면 없어지니까. 내가 좋아하면 자꾸 없어져. 내 취향이 이상한가? 근데 같이 온 사람들도 다 좋아했고, 그 사람들도 다시 오고 그랬는데..공사 진행 중인 인사동, 종로의 수많은 건물들을 비춘다.아름: 아 이건 기억해? 로또 되면 우리가 좋아했던 공간 사서 장사하자고 했던 거? 이제 로또 1등 돼도 못 사겠지만. 거기 싹 밀고 큰 건물들 지었더라. 그 건물들 밑에 우리가 주고받은 술주정이 묻혀 있는 거야. 그래서 내가 요즘 주사가 줄었나? 아.. 사장님 안주 너무 먹고 싶다. 다른 곳에서 장사하고 계실까? 그때 그 맛 그대로일지도 궁금하네. 우리가 변했든 사장님이 변했든 뭐든 변했겠지.아름과 B, 남은 소주를 비운다. #3. 공원 벤치. 아름과 C 종이컵에 세 번째 소주잔을 주고받는다. C: 야, 이제 여기 앉아 있지도 못하겠다. 아파트에서 뭐라고 하는 거 아니야? 빨리 마시고 어디 들어가든 하자.아름: (소주를 꿀꺽 삼킨다. 상기된 목소리로) 뭐라고 하면 죄송합니다 하면 되지! 저 시멘트? 콘크리트? 어쨌든 저게 야경이고 산이고 다 가려버리고. 나 어릴 때 놀던 골목길, 방방, 문방구 다 밀어버렸는데. 저기 봐. 불빛이 쪼로록 줄지어있는 저거. 저렇게 살면 좋은가? 사람 위에. 사람 아래 사는 게.공원의 밤하늘, 나무, 주택의 불빛과 아파트의 불빛을 비춘다.C: 너 오늘 좀 시끄럽다?ㅎㅎㅎ아름: 아니 들어봐. 초등학생 때 학원 간다고 이 골목 올라오면서 친구 엄마랑 인사하고, 열쇠 안 가지고 나온 날은 옆집에서 TV 보고 보리차 마시고 그랬는데. 동네 어른들이랑 이야기 나누고 귀염받고 가끔 잔소리 듣고. 봐봐 여기가 내 사회성을 만들어줬다니까.마을버스 종점에서 내려오는 몇몇 사람들이 아름과 C, 소주병을 힐끗 본다.아름: 난 지금도 계속 우리 동네 좋아. 술 취해 들어오는 거, 남자가 바래다 주는 거 동네 아줌마들이 엄마한테 다 말해버리지만! 그래도 안 없어졌으면 좋겠어. 나한텐 고향이고 내 기억이란 말이야. 집에 들어오는 길에 별 보고, 달 보고, 고양이 보고, 꽃 보고 그러면서 컸으니까. 앞으로도 더 그렇게 계속 크고 싶다고.C, 종이컵과 소주병을 치우며 한숨쉰다. #4. 춘천, 닭갈비집. 석쇠 위 닭갈비를 뒤집는 D, 아름은 네 번째 소주잔을 따른다.아름: 다시 춘천에서 이렇게 닭갈비에 술 마실 줄은 몰랐다. ㅎㅎ 영화 안 하니까 속 시원해요?D: 시원만 하겠습니까, 아주 개운합니다! 서울은 어때요? 관객들 좀 오세요?아름: 비슷하죠. 하루에도 몇 번씩 예매 페이지 보면서 잔뜩 쫄아있어요. ㅎㅎㅎ 예전에 농담으로 춘천으로 오라고 지원사업 많다고, 근데 관객은 없다고 했던 얘기 아주 가끔 생각나요. 그것도 옛말이지만. 뭘 해야 관객들이 좋아할까, 궁금해할까 그 답을 알고 싶어요. 아시나요?D: 알면 제가 계속 일하고 있었겠죠?아름: ㅎㅎㅎ 그래서 나는 이제 내가, 우리가 좋아하는 거 하려고요. 나도 관객이니까! 이렇게 정신 승리하고 있습니다!철판에 눌어붙은 닭갈비에서 양념이 떨어지며 숯불에서 연기가 난다. 아름: 춘천하면 나는 뭐가 떠오르게요? 영화요. 그리고 관객들. 상영이 끝나고, 행사 끝나고 나눴던 기억 나지 않지만 분명 좋았던 대화들. 난 닭갈비보다 이게 먼저 떠올라요. 춘천의 이미지를 D가 만들어줬어요. 고마워요.D: 취했네, 취했어.아름과 D 담배를 핀다. 주변은 어둡고, 지나가는 사람은 없다. #5. 충무로 대한극장 뒷골목 오래된 노포집. 해산물 한 접시와 초장이 놓인 테이블. 아름과 E 다섯 번째 소주잔을 주고받는다.아름: 내가 서울 오면 꼭 연락하라고 몇 번을 얘기했는데! 이제야 대접할 기회를 주는 거 너무하다 생각 안 합니까?E: 아이고, 그게 부담스러워서 연락 못 한다 생각은 안 합니까? ㅎㅎㅎ 덕분에 대한극장 없어지기 전에 영화 봤어요.아름: 이렇게 오래된 곳은 다 없어지는 게 맞는 건가? 원주 아카데미극장도 그렇고.. 대한극장도 그렇고.. 할 수 있는 게, 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게 속상하다. 한동안 충무로 오면 씁쓸하겠네.E 말없이 소주잔을 비운다. 아름 E의 잔을 채워준다.아름: 얼마 전에 조치원 다녀왔어요. 오래전부터 알던 분이 상영 공간 만들었다고 해서, E도 그렇고 조치원 대표님도 그렇고 대단해. 어쨌든 영화 보러 갔는데, 난 당연히 나만 있을 거라 생각한 거야. 편하게 와인 마시면서 영화 봐야지 이러고 준비 다 해갔는데, 관객이 있는 거예요! 상영관에 관객 있는 게 당연한 일인데 그걸 전혀 생각을 안 했다니.. 내가 너무 멍청하고 창피하더라고요. 그래서 방해되지 않게 구석에서 조용히 얌전히 영화만 봤어.E: 아니 너무하네. 관객 없으면 유지가 되겠습니까ㅎㅎㅎ 우리도 종종 관객 온다고요!아름: 그러니까, 내가 아주 별로인 생각을 했어. 나 그날 본 영화 관심 없었거든요. 내 취향 아니다 생각했어. 근데 너무 잘 봤다? 상영 환경 극장보다 당연히 안 좋고, 주변 소음도 들어오고 하는데, 처음에 좀 거슬린다 하다가. 점점 일부처럼 받아들였어. 그래서 그 영화가 더 마음에 들어왔나? 아니면 내가 조치원 사장님이 좋고,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워서 좋았나? 이유를 모르겠는데 어쨌든 좋았어!E: 우리 공간 오는 관객분들 중에도 그런 경우 있어요. 호기심에 처음 왔던, 자기 취향이랑 비슷한 곳을 만났단 반가움이던, 극장과는 다른 감흥을 준다고. 그렇게 말하고선 자주 오지는 않지만, 하하.아름: 그런 경험들이 쌓여서 독립영화, 단편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는 거지. 우리도 그랬잖아요. 정확히 뭐 하는 곳인지 모르겠는데 멋있고 좋아 보여서 사부작사부작 다니다가 다른 영화들, 극장, 영화제 찾아보고. 우리 E대표님이 독립영화 타겟층을 넓히고 계신 겁니다.ㅎㅎㅎㅎE: 아, 그 이유만으로 이렇게 먹고 사는 건 너무 어렵다! 대신 좀 해줘요!손님으로 꽉 찬 노포집. 아름과 D는 시답잖은 농담과 씁쓸한 속마음을 주고받으며 술잔을 이어간다. #6. 정동진, 개막식을 앞둔 초등학교. 습기와 열기, 사람들의 체온이 가득하다. 아름: 와, 갈수록 정동진은 사람이 많아지네. 내년에는 서서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술로 이 분주함과 더위를 이겨내자!동의하지 않지만 어쨌든 여섯 번째 소주잔을 채워주는 F. F: 영화 시작도 전에 취하겠다. 적당히 마셔라. 지겨워 지겨워.아름: 이렇게 영화 보려고 정동진 오는 거지! 물놀이하고, 낮잠 자고, 치킨에 복숭아에 술 마시면서 별보다 영화보다. 이렇게! 내가 더위, 습도 진짜 질색인데 정동진에선 괜찮아! 이게 낭만이지.아름과 F의 주변 공간이 점점 돗자리와 사람들로 채워지고, 여유롭던 아름과 F는 자세를 고쳐 앉는다.아름: 이제 누워서 영화 보는 건 옛말이지만, 이름만으로 기쁘고 설레는 경우가 몇이나 되겠어. 특히 나처럼 심심하게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같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을 이렇게 많이 만날 수 있는 일도 잘 없고. 이런 힘으로 또 1년 살아가는 거지. 근데 이런 영화제들 지원이 다 줄었다잖아. 아니 도대체 얼마 주지도 않으면서 그거 줄여서 어디다 쓴다고. 꼭 당장 돈을 벌어와야 하나? 이 많은 사람들의 낭만을 뺏으려고 하다니 낭만 없는 삶은 너무 지루하잖아..F: 적당히, 조용히 해라. 내 기분 망치지 말고.아름: 이런다고 말하지 말라, 저런다고 말하지 말라. 그러면 언제 누구한테 말해야 하나. 이렇게 덕분에 즐기고 있으면 같이 분노해서 같이 지켜야지.F: 네네, 선생님 말씀이 다 맞으시고요, 저는 이제 영화를 보고 싶습니다.아름: 내 말은 또 허공으로 날아가는구나. 그래요. 복숭아 먹으면서 영화 보고, 2절은 바닷가에 가서 하겠습니다.아름과 F 옆에 쑥불을 태우는 영화제 스탭이 매운 눈물을 훔치고 있다. #7. 얕은 물을 따라 물고기가 헤엄치는 바닥이 멋진, 차와 술을 파는 술집에서 아름과 G는 일곱 번째 잔을 주고받고 있다.아름: 내가 쓴 글 읽어봤어요? 내 부족함을 다 들킨 것 같아 굉장히 부끄럽네. 좋아하는 사람이 제안한 거라 잘하고 싶었는데, 그게 마음만으로는 영 어려운 일이더라고.G: 쓰면서 아름이 즐거웠던 것 같은데, 그럼 된 거죠. 이 상황에선 무슨 대답을 하든 거짓말이라고 할 테니까.아름: 그건 맞지. G를 보면 처음 상영회 하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말했나? 물론 나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멋지지만! 그래서 친해지고 싶었고, 더 얘기하고 싶었어요. 안 힘들어요? 난 처음에 많이 힘들었는데.G: 음, 힘들다! 보단 모르는 게 많아서 답답하고, 겁이 나요. 막상 하면 별거 없다는 거 아는데 자꾸 생각, 고민이 더 먼저 자리 잡아요. 그러다 때를 놓치고, 그러고 나면 후회하고, 또 반복하고.아름: 맞아. 나도 그랬어요. 주변에서 제안이나 의견 주면 뭔지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저건 우리랑 결이 안 맞다면서 관심도 갖지 않았어요. 그래서 지금도 우물 안 개구리처럼 좋아하는 것만 하고 있나 봐요. 결국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이 되어버렸지만. 더 많은 경험을 해야 한다 이런 꼰대 같은 잔소리와 뭐 그런 기타 등등의 이야기 많이 듣죠? 나는 그것보단 G가 지치지 않고 즐겁게 기획하고 사람들을 만났으면 좋겠어요.G: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ㅎㅎㅎ아름: 물론 나도 매번 실패하지만, 그래도. 우리를 찾는 사람들 덕분에 금방 에너지 얻기도 하니까! 그 좋은 기억 때문에 버티고 성장하는 거지. 든든한 동료들도 있고!G: 내가 든든합니까? 하하.아름: 물론요. G도 있고, 관객으로 만나 이제는 서로의 안부를 묻고 건강을 챙기는 사람들도, 함께 작업한 동료들도, 잘 버텨주는 극장과 공간들도 든든든든든든해요! G에게도 내가 그런 동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아름 남은 소주를 G에게 따라주며 한 병 더 주문한다.아름: 있죠. 내가 좋아했던 공간들은 나를 위해 필요했고, 나를 위해 계속 찾았던 장소인 것 같아요. 내가 더 잘 살려면, 다정한 삶을 살려면. 없어지면 속상해하고, 다른 장소를 찾고. 그랬던 것 같아요. 공간 하나하나가 다 인연이라 생각해요. 어찌 되었든 우리 오래오래 같이 소주 마십시다.G가 아름의 잔을 다시 채운다.END최아름영화 상영 동호회 ‘낫띵벗필름’ 8년차.진심과 허상을 담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