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구 토박이 혁이의 우리 동네 플렉스 방법 강서구는 왜 노잼 도시라 불릴까? [목차]1. 강서구는 왜 노잼 도시라 불릴까?2. 강서구 청개구리3. 화곡동은 내 아지트4. 혁이의 강서구 플렉스 방법5. 화곡초, 마포중, 명덕고 강서구 토박이의 과거 일상6. 강서구 MZ들은 어디서 플렉스하는가?1. 강서구는 왜 노잼 도시라 불릴까?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만, 언제부터인가 강서구는 재미없는 동네가 되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런 걸까 생각해 보며 곱씹어 봅니다.저는 원래 10년 전, 강서구 원도심인 화곡동에 살았던 강서구 토박이였습니다. 그리고 동네 친구들과 청춘, 낭만이 가득한 동네 산책을 좋아했습니다. 파릇파릇한 20대에 주말이면 언제나 동네 친구들과 뒷동산인 봉제산, 저 큰 도로 너머의 앞동산인 우장산을 무슨 제 아지트 삼듯이 돌아다녔단 말입니다. 그래서 화곡동은 아직도 저의 1st 아지트이자 18번 곡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10년 전에는 강서구청과 우장산역 라인의 아파트를 제외하곤 대부분 빨간 주택단지들이 즐비했습니다. 발산역이 강서구 상권의 마지노선이었고, 더 넘어가면 상당히 암흑이 짙은 거대한 농로와 공항대로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언제나 화곡동은 저의 유일한 아지트이자 낭만이 담긴 청춘 그 자체였습니다.그러다 2015년 이후로 마곡 라인을 따라 논이 사라지고, 1년 만에 용적률 짱짱한 기반을 다져놓았더군요. 그 점을 보면서 정말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하물며 그 당시 서울특별시에서는 서남권 라인 재개발과 묶어서 강서구 김포공항 일대 그린벨트를 해제하고 고도 제한을 낮춘다는 이야기를 하루 종일 뉴스에서 대서특필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서울시에선 강동, 강남에 비해 낙후된 강서구의 새로운 도전과 발전을 기대하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예비 타당성에 관하여 주민들도 관심이 무척 컸던 모양입니다.저에게 있어서 2015년 기점으로 강서구의 본질적인 취미생활과 행동반경, 더군다나 문화생활이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2015년 전후로 강서구의 문화와 정치, 예술 그리고 심지어 사람들의 변화도 180도 달라졌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제가 알던 강서구는 원래 예로부터 벼가 많았습니다. 그건 유래라고 부르기엔 불과 2015년 기점으로 옛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강서구 북쪽 라인인 마곡동과 발산 라인은 죄다 논밭이었습니다. 그러한 옛 풍경은 여전히 강서구청 근현대 아카이빙 사진이나 제가 고이 간직한 옛 클라우드에도 남아있습니다. 이는 저만의 생각과 추억이라고만 부르고 싶지 않습니다. 10년 전부터 살았던 강서구민들은 여전히 기억하기 때문입니다.그러니까 저는 항상 자연친화적인 강서구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화곡동이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뻔쩍뻔쩍한 고층 오피스텔과 빌딩 숲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알던 까치분식과 강서구청 먹자골목은 어디 있는지 가끔 근처를 배회하다 보면 옛 생각에 잠기기도 합니다. 더 충격적인 점은 2015년 이후, 동네 친구들을 이제 영영 볼 수 없습니다. 아직 강서구에 있다면 연락해다오- 물론 내가 먼저 연락하지 못 해서 미안하다!이 글을 적으면서 그때의 향수가 여전히 느껴집니다. 제가 정말 사랑하고 좋아하던 강서구는 이제 추억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화곡초 야구부와 마포중의 전설, 그리고 명덕고의 농구장 코트는 점차 서서히 사라지더니 그 자리에는 스마트폰을 만지며 학원만 다니는 꿈나무 아이들만 서성거립니다. 작은 공원들이 20개 이상 넘쳐났던 화곡동과 우장산동, 그리고 까치산 일대는 점차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겼고, 더군다나 새로운 청년 예술가들 또한 다른 동네로 떠나버렸고, 동네 친구들과 함께했던 화곡본동 시장 노포의 흔적도 이제 보기 힘듭니다.화곡동 토박이분들 중에 볏골공원을 아는 사람들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라인 일대는 꿈나무 초등학생, 어린이들의 제1의 아지트였습니다. 아마 20년 전에도 그러하였고 지금도 그리 바뀌지 않았기에 그 추억을 벗 삼아 자주 찾아가곤 했습니다. 주변에는 화곡 시장이 있어서 더 생활 밀착형 라이프를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긴 합니다.하물며 화곡동에는 타지역에서 저렴한 임대 공간을 찾으러 온 젊은 예술가들이 많습니다. 화곡동 청개구리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 진짜입니다! 특히 화곡동에는 각종 인플루언서와 마케팅 관련 종사자들도 상주하는 기숙사가 따로 있습니다. 그만큼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고 그 업을 바탕으로 자기의 생산력을 극대화하고 싶은 분들이 많아서 참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예술가들이기에 화려하고 삐까뻔쩍한 곳에 지낼 수 없다는 그 괴리감도 있습니다. 꼭 돈이 많아야 예술가가 되라는 법은 없잖아요? 반대로 예술가가 또 돈이 많을 수도 없는 게 현실이며 그에 따라 이런 문화가 공간에 반영되는 곳이 딱 화곡동이었습니다.저는 한때 강서구를 사랑했지만, 점차 재미가 없어지는 이유는 강서구 상주 예술가들이 다 떠나가고 상업적인 예술가들 위주로 점차 유입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독립서점과 문화 예술 활동, 그리고 화곡동과 강서구의 정체성인 여러 어린이 공원을 등한시하며 오직 강서구 내의 경제적 효율성만 추구하는 모순된 행동과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마곡동이 점차 예술 거점 지역으로 선정되는 시점인 2015년에 타지역의 독립 예술가들이 자신의 예술 활동 반경을 넓히며 기존의 토박 예술가들을 내쫓는 형태로 보였습니다.전 기존의 화곡동 예술가들의 삶의 터전이 사라짐에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동네 친구들이 떠난 이유 또한 화곡동 토박이 예술가들이 사라진 이후부터입니다. 화곡본동 소나무 공원 앞의 와인 재즈바는 어느새 사라지고, 화곡초 일대 앞 예술가들의 허기진 배를 달래던 노포와 노장은 흔적조차 없어졌습니다. 점차 오피스텔이 우후죽순 생기면서 부유한 중산층과 돈에 궁핍한 타지역 예술가들만 유입 중입니다. 빨간 벽돌이 즐비하고 한때 홍대 놀이터처럼 그래피티 난무했던 낭만의 거리는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 빨간 벽돌은 점차 회색빛으로 변하면서 저의 추억은 과거에 그대로 머문 듯합니다.2015년 우장산 둘레길을 기억합니다. 돈이 없어도 몽골텐트 3-4개 정도를 어찌하여 빌리고 플리마켓과 주전부리 주점으로 생계를 이어갔던 당시 대학생의 저를 여전히 기억합니다. 한때 화곡동 예술가가 되겠다며 책을 내며 독립서점 하나 차리겠다던 친구 D, 까치산 일대 먹자골목에서 새벽 2시까지 게릴라 버스킹을 진행하던 친구 J, 그리고 평생 이러한 활동을 기록, 기억하고자 화곡동 라이프를 영상으로 만들어 팝업스토어를 운영하고 싶어 했던 저 자신의 모습까지 하나의 추억으로 압축하여 우장산 둘레길 어딘가 묻었습니다. 허나 흙먼지 날리던 폴리텍 대학 운동장과 장난기 가득하고 자부심 넘쳐났던 화곡동 젊은 예술가들의 밝은 얼굴은 이제 보기 힘들 겁니다.2015년 혁이의 동네 투어를 기억합니다. 그 당시 강서구가 빠르게 변화했기에 빨간 벽돌과 담들이 무너지는 곳들을 사유하는 걸 좋아했습니다. 한때 강서구 대학생 패키지 여행사를 차리고자 했던 저의 모험 심리는 과거에 머물렀지만, 결과는 좋았습니다. 50명 남짓했던 익명의 친구들과 함께하여 더욱 재밌었고 좋은 취지의 영향력을 발휘했던 과거였습니다. 동네를 사랑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고, 더군다나 당시 화곡동 예술가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에 저는 강서구, 특히 화곡동을 사랑하고 좋아했습니다.하지만 이젠 동네 문화 생태계를 혼란케하는 외부인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강서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며, 상권을 파괴하기 시작했습니다. 강서구를 사랑했던 가장 큰 이유는 화곡동 예술가들의 도움이 컸기 때문입니다. 서로 상부상조하며 교류가 많았던 10년 전의 화곡동이 그립습니다. 그들이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 강서구에선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기존의 예술가들을 돌아오게 하는 방법에는 어떠한 점이 있을지, 왜 그들은 강서구를 떠났을지 계속 곱씹어 봐야 합니다. 강서구가 노잼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 생각에는 기존의 예술가들이 다시 유입되도록 해야 합니다. 중요한 점은 새로운 문화적 정체성을 만들기보다는 기존의 문화 생태계를 본받아 온고지신하는 다양하고 참된 예술가들이 많았으면 합니다. ‥ 갓혁 *본지에 실린 외부 원고는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본지의 공식 견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