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의 일기사람지도를 그려본 적 있나요? 나와 주변 사람들의 지도 말입니다. 저는 저의 사람 지도를 상상할 때마다 바다 한 가운데에 서있는 기분입니다. 제 지도 속 사람들은 모두 땅처럼 멈춰있지요. 섬처럼. 바위처럼. 때로는 지평선 너머 어딘가처럼 말입니다.가끔 눈을 감고, 지도를 걷습니다. 바다 위를 걷는 제 모습은 오류난 게임 속 캐릭터처럼 삐걱거립니다. 아무래도 바다 위니까, 자연스러울 리는 없겠지요.오늘은 제 지도 상에서 저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섬 몇 개를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각 섬에 발을 들이면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마치 가상 현실 게임 속에 있는 듯한 광경이 펼쳐집니다.A. 슬픔의 섬슬픔의 섬에 도착합니다. 캄캄하고 작은 A의 방입니다. 빛이라고는 작은 TV에서 번쩍이는 불빛뿐입니다. 그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A의 뒷모습이 보입니다. A에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뭘 보고 있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영화.” A가 대답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영화... 그게 무엇인지, 왜 하필 무서운 영화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저는 더 이상 묻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A가 알려주겠지, 하는 마음으로요.저는 A가 제게 말을 걸 때까지 그를 부르지 않고, 방 한구석에서 A를 기다립니다. 불이 켜지면 A는 저를 바라보고 있을 거예요. 그는 품만한 사각 얼음을 안고 있을 테지요. 그리고 제게 말할 겁니다. “가자.” 그러면 언제나 우리는 강을 향합니다. 뚜벅뚜벅 걸어서, 가끔은 누구 것인지 모를 차를 타기도 합니다. A는 그의 품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얼음을 안고 말없이 걷거나 창밖을 바라봅니다. 얼음은 A의 품 안에서 조금씩, 눈물을 흘리듯 녹아 그의 옷을 적십니다. 강에 도착하면 A는 얼음을 강물에 놓아줄 거예요. 그 강의 물결은 항상 끊이지 않고 흐릅니다. 얼음은 물결을 따라 멀리멀리 사라질 테고, 얼음이 녹으면 얼음 가운데에 얼어있던 금붕어도 멀리멀리, 물결을 헤엄치겠지요?TV 앞에 앉아 있는 A를 몰래 들여다보았을 때, 그의 품에 안긴 사각 어항을 보았습니다. 언제인가 A는 말했어요. 슬픔을 누군가 가져갔으면 좋겠다고요. 그 어항에는 A의 얼굴에서 떨어진 물이 차올랐고, 그 안에서 금붕어가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영화가 쉽게 끝나지 않네요. 이만 자리를 떠야 할 것 같습니다. 아마도 A는 제가 온 것을 알고 있을 거예요. 언제나 불을 켜지면 저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요.B. 빛의 섬저는 어느 차의 운전석에 있습니다. 창밖은 해가 저문 밤입니다. 사람들은 밤임에도 분주해 보입니다. 길을 청소하고, 건물을 올립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기도 하고, 여럿이 모여 웃음을 터트리기도, 홀로 길에 앉아 울음을 참기도 합니다. 차 안은 조용해요. 저는 조용히 평안을 느낍니다. 그렇게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보면 곧 B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보입니다. 정확히는 B가 올라간 기둥이 보이기 시작하지요. 기둥의 꼭대기에서 번쩍, 빛이 깜빡입니다. B가 열심히 빛을 만들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도시 불빛 사이에 제 자리를 지키는 높은 콘크리트 기둥의 꼭대기.그곳이 B의 자리입니다. B가 만드는 빛이 흔한 가로등 빛이라고 말하기에는 특별해요. B가 직접 빚은 빛은 건물 벽에, 바닥에 혹은 사람에게 닿아 모양을 냅니다. 웃던 사람을 울게 만들기도, 울던 사람을 웃게 만들기도, 바삐 길을 가던 사람들의 시선을 한 곳에 모으기도 합니다.그러나 제가 탄 차는 B의 기둥에 도착해도 멈추지 않습니다. 저는 B가 만든 빛을 구경하다가, 고개를 들어 기둥의 꼭대기를 바라봅니다. B가 빛을 만드는 모습이 보여요. B는 대부분 저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가끔 가까이 온 저를 발견하면 손을 흔들어 주고요, 저도 창밖으로 힘차게 손을 흔들어 보입니다. 그렇게 다시, 제가 탄 차는 도시로 향합니다. B에게는 도시 속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까요. 저와 B는 한때, 저 빛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실험하던 사이랍니다. 그 이야기는 생각보다 기니까 나중에 해드릴게요.C. 갯강구의 바위갯강구의 바위에 도착하면 지도와는 또 다른 망망대해가 펼쳐집니다. 이 바다 위엔 햇볕이 내리쬐고, 구름이 떠다닙니다. 양지와 음지를 번갈아 가며 만들지요. 서늘한 바람도 함께 불어서, 바다 구경하기 딱 좋은 날씨입니다. 저는 그 바다에 유일하게 솟은 바위 위에 있습니다. 비좁고 얕은 바위라서 바다에 빠지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물결이 발 위를 오르내립니다. 오랜만에 햇볕을 쬔 탓에 피부가 어색한 듯 달아 오르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제가 앉은 자리에는 항상 비치타월이 깔려있습니다. 덕분에 아주 누워버릴 수도, 한쪽 팔을 베고 옆으로 누울 수도 있어요. 옆으로 누워 바다를 바라본 적 있으신가요.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수직으로 서있는 광경이 신비롭습니다.이 바위에는 갯강구가 많습니다. 누워서 바다를 구경하다 보면 갯강구가 눈앞으로 다가오고는 합니다. 그럴 때마다 몸이 굳고 소름이 돋지만, 이내 작은 웃음이 새어 나옵니다. 기분이 나쁘다고 갯강구를 던져버리거나, 벌떡 일어나 호들갑을 떤다면 C가 마련해 둔 자리가 흐트러질지도 몰라요. 어쩌면 멀리서 직접 노를 저어 오는 C가 보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작은 것에 기분을 망치지 말자는 약속 때문이지요. 직접 노를 저어오는 탓에 C의 팔뚝에 힘줄이 다 비칠지도 모릅니다. 그 울그락불그락 하는 얼굴을 상상하면 웃음이 터지지만, 일부러 부르지는 않도록 합니다. C가 이 바위까지 오려면 몸보다 넓은 밀짚모자를 쓰고, 한 뼘만 한 보트에 몇 달 치 식량을 태우는 등... 아주 많은 힘을 들여야 하기 때문이죠. 저는 살짝 입바람을 불어 갯강구를 밀어냅니다. C도 멀리서 이 약속을 잘 지키고 있겠지요? 안 그러면 제가 노를 저어 찾아갈 거니까요. 오늘도 살랑이는 파도가 보기 좋습니다. 햇빛이 필요할 때마다,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고는 합니다.다시 지도 한가운데에 돌아옵니다. 자리에 누우면 바람이 붑니다. 별도 보이고요. 섬을 돌아본 이후에는 상상 속에서도 또다시 눈을 감게 됩니다.몇몇 섬들을 생각합니다. 있다가 사라진, 혹은 이 지도에 떨어지지 못한 별똥별들을요. 눈에 보였다가 사라진, 지금은 없는. 그런 것. 그렇게 그들을 생각하다 보면 조용히 멈춰있는 섬들이 고맙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였다면, 저는 얼마나 무서웠을까요.그러다 또다시 저 섬들도 사라져 버릴까, 바다 아래로 잠겨버리지는 않을까 두려워집니다.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를 상상하면,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거란 기분이 들어요. 이 지도는 제 상상 속 이미지이지만, 저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거든요. 항상 그때를 대비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 그곳에서도 자리를 잃지 않는 방법을 상상해 봅니다. 누군가 물결에 떠내려오지 않을까?, 이런 기대조차 하지 않는 마음을요.그렇게 다시 허리를 세우고 섬들을 바라봅니다. 사랑은 살피는 것이라 배웠어요. 내게 사랑을 주거나, 주지 않던 것들에게서요. 학창 시절 음악을 듣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온통 남녀의 연애 얘기뿐이던 대중가요를 듣고는 ‘이런 게 사랑이라면 너무 뻔하고 지겹잖아!’ 서툰 평가를 내렸던 때. 그러나 세상은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모든 것을 알려주었고, 저는 다시 ‘내가 감당하기엔 사랑의 범위가 너무 넓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후로 이 지도가 만들어진 것 같네요 ㄴ내가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요,다시 홀로 남은 바다, 나는 이 지도에 무엇을 더 들일 수 있을지 생각해 봅니다. 사랑의 범위는 너무 넓어서, 내가 무엇을 살핀다는 건 아주 간단한 일이라서. 세상에는 사랑할 수 있는 것투성이인 것 같습니다. 바람이 붑니다. 지구를 메우고 있는 공기덩이처럼 사랑도 세상을 가득 감싼 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 바람이 사랑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을까요. 당신은 이 바람을 타고, 바람에 일렁이는 물결을 타고 이 지도에 들어오실 건가요.앞으로 더 자주 이 지도에 들어올 생각입니다. 바다 한가운데에서도, 섬에 들어간 이후에도 바람이 계속 불어옵니다.‥ 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