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생각이 들었다_어느 날 문득 <지우개 똥>어떤 작업을 하면 어떤 것이 남습니다.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고 만드는 걸 좋아했던 터라 여러 재료들과 도구들이 많았어요. 미술 자체도 좋아했지만 미술을 하면서 가질 수 있는 색색깔의 물감, 종이, 연필 등을 더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또 좋아했던 건 작업 중에 늘어놓은 재료와 도구들의 풍경, 그리고 작업 후에 발생하는 작은 조각들. 미술 시간 수업내용에 잘 집중하다가도 잘린 색종이 조각이라거나 연필을 깎다가 남겨진 흑연 가루, 어떻게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는 실, 플라스틱, 찰흙 등의 잔재들을 가만히 보고 있었습니다. 그 중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에 가장 흥미로웠던 건 지우개였어요. 그 당시 미술용 지우개 하면 잠자리표 지우개가 대표적이었는데요. 보통 지우개보다 잘 지워지고 말랑말랑하지만 미술을 안 하던 친구들은 잘 쓰지 않거나 몰라서 마치 미술학도의 훈장처럼 들고 다니던 지우개였지요. 하지만 무른 만큼 잘 부서지고 지우고 나면 가늘고 긴 잔해들이 많이 남아 주변이 지저분해지기 십상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걸 지우개 똥이라고 불렀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은 그 똥들을 모아 동그랗게 빚기 시작했죠. 처음에는 지저분한 자리를 청소하는 개념으로 모으기 시작했는데 또 이게 마치 찰흙처럼 몰캉몰캉하고 탄성도 있어서 뭔가 만들기 딱 좋겠다 싶었어요. 잠자리 지우개에 프린트된 잠자리도 만들고 스마일도 만들고 포도나무도 만들고 있었어요. 무엇이든 많이 하면 는다고 그렇게 하나, 둘 만들다 보니 진한 부분을 지운 지우개 똥은 진하고 연한 부분을 지운 지우개 똥은 연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죠. 지우개 똥 반죽에 명암을 넣어 만들기 시작했어요. 사람 얼굴도 만들었던 것 같고 말도 만들었던 것 같아요. 여러 명암으로 아주 공을 들였습니다. 하얀 반죽이 필요하면 빈 종이를 벅벅 지워서 흰 반죽을 만들기도 하고 까만 게 필요하면 종이에 연필로 칠하고 지우개로 지우기를 반복해 만들곤 했어요. 그렇게 여러 차례 뭔가를 만들다 보니 결과물들이 정교해지기도 하고 애정도 생겨서 필통에 예쁘게 모아 놓고 다녔는데 어느 날 미술학원 선생님이 놀라며 ‘이걸 다 지우개 똥으로 만들었어? 대단한데~!’ 라고 하시며 ‘지우개로도 이렇게 만들 수 있으면 찰흙으로도 만들어봐.‘ 말씀하셨죠. 그 순간 선생님께 혼이 난 것도 아닌데 뭔가 기분이 이상했어요. 이렇게 열심히 반죽하고 정교하게 작업할 거면 차라리 지점토를 써서 크기를 키우거나 고무 찰흙을 써서 여러 색으로 표현했을 텐데 말이죠. 갑자기 애정했던 지우개 똥 작품들이 초라한 느낌이 들었어요. 물끄러미 바라보다 ’하지만 이건 다시 지우개로도 쓸 수 있잖아?‘라고 애써 생각했지만 그것도 그다지 큰 위로가 되지는 않았죠. 박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