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동 늦다리, 만교(晩橋), 최춘선 할아버지1919년 지도를 보다 보니 ‘만교’(晩橋)라는 곳이 나옵니다. 동네 어른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종종 옛 지명을 들을 때가 있는데 '만교'는 처음 보았습니다. 대부분 논이었다 보니 저 부근(좌측 지도)에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을 만교라고 부른 듯합니다.2011년 YTN 라디오에 공항동 동네 이름이 소개되었는데 한국땅이름학회 배우리 회장의 말에 따르면 '늦다리(만교)'는 '고려 때 수원으로 통하는 국도를 닦을 때, 이곳에 놓은 돌다리 공사가 늦게 이루어졌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 근처를 돌아다녀도 돌다리 흔적은 찾을 수 없습니다.)2009년 2월 13일 서울역사편찬원이 펴낸 <서울지명사전>에서 늦다리는 '강서구 공항동에 있던 마을로서, 눌언마을의 눌언방죽에는 고려 때 수원과 송도로 통하던 다리가 있었는데 이 다리를 만들 때 공사에 어려움이 있어 준공이 매우 늦게 된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만교 · 만교동이라고도 하였다.'라고 합니다.서울지명사전은 온라인으로도 잘 정리되어 있는데 '늦다리'와 관련한 지명은 총 7건이 검색됩니다.공세논골짜구니강서구 공항동 늦다리 근처에 있던 골짜기이다.누랭이방죽다리강서구 공항동에 있던 다리이다. 누랭이방죽에 있는 작은 돌다리에 붙여진 이름이다. 누랭이방죽다리라고도 하였으며, 옛날 송도와 수원 사이 국도에 있던 다리로 준공이 늦어져 늦다리, 한자명으로 晩橋라고 하였다. 1966년 발간된 ≪한국지명총람≫에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없다.늦다리강서구 공항동에 있던 마을로서, 눌언마을의 눌언방죽에는 고려 때 수원과 송도로 통하던 다리가 있었는데 이 다리를 만들 때 공사에 어려움이 있어 준공이 매우 늦게 된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만교・만교동이라고도 하였다.늦다리길늦다리길은 이 길이 지나는 마을 앞에 위치한 다리인 늦다리에서 유래되었다. 늦다리는 강서구 방화제1동 609-167번지(공항로)에서 공항중학교를 지나 공항동 7-1번지에 이르는 폭 10m, 길이 750m의 2차선 도로이다. 이 길은 1997년 5월 6일 처음 늦다리길로 이름 붙여졌다.뒤너머골강서구 공항동에 있던 마을로서, 늦다리마을의 뒤쪽 너머에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뒤너머골이라고도 하였다.뒤너미강서구 공항동에 있던 마을로서, 늦다리마을의 뒤쪽 너머에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뒤너머골이라고도 하였다.자개방죽논강서구 공항동 늦다리 근처의 들에 있던 논으로서, 자가사리가 끼는 논이었다고 한다.한국항공협회에서 펴낸 <2020 항공진흥>에는 특별기고로 <김포공항 지역 땅이름과 공항 지형 입지조건 연구(김영천)>이 실려있는데 '늦다리'를 다르게 해석합니다.늦다리[마을]고려 때 수원으로 통하는 국도를 닦을 때 이곳에 놓은 돌다리 공사가 ‘늦게 이루어졌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 한다. 그러나 ‘늘어졌다’ 뜻의 ‘느러’라는 말이 ‘느러>늘>늦(晩)’으로 변하였고, 들판의 ‘들’이란 말이 ‘들>달>다리(橋)’로 변한 것이 합쳐져서 ‘늘어진 들판 위에 형성된 마을’ 이란 뜻의 ‘늦다리’ 땅이름으로 굳혀졌다가 한자로 ‘만교’(晩橋)로 된 것이다.시간이 지남에 따라 '만교'라는 지명이 이동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재는 공항초등학교 앞이라고 나옵니다. 1919년 지도에서 송정초등학교 뒤편으로 나왔던 것이 꽤 멀어졌습니다.그리고 '만교'를 검색하다 보면 최춘선 할아버지가 나옵니다.만교 최춘선(1921 ~ 2001. 09. 08 향년 80세)은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며 목사다. "맨발 할아버지"로 불린다. 부친은 부농이었다. 넉넉한 가정형편을 바탕으로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5개 국어를 할 수 있었다. 가가와 도요히코와 우치무라 간조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 징용을 거부하고 만주로 가서 광복군 섭외부장 등 임시정부 광복군 간부로 활동했다. 독립유공자에 지정되었으나 모든 혜택을 거부했다. 광복 후 신학교에서 교육받아 목사가 되었다. 안수는 한국 그리스도 교회에서 받았으며, 1949년 김포 그리스도 교회 목사로 시무했다. 이후 한남동 번듯한 주택에 살았고, 김포공항으로 들어가는 큰길에서 인천 국도까지 수십만 평에 달하는 상속재산을 실향민, 빈민들에게 기부했고, 남은 땅 3,000평은 사기당했으나 고아를 돌보는 등 선행을 멈추지 않았다. 70년대 초 목회를 접고 문서선교와 노방전도에만 전념했다. 통일할 때까지 맨발로 걷겠다고 선언하여 죽을 때까지 신발을 신지 않았다. 지하철에서 전도하던 도중 앉은 채로 소천하여 만화와도 같은 종지부를 맺었다.교회 관련 자료에서도 이름이 보이곤 합니다.1957년 7월 11일(목) 오후에는 김은석이 경기도 김포군 양서면 송정리 만교 최춘선의 자택에 도착하여 저녁에 김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스가랴 7-8장을 봉독하였다.1957년 7월 11일 오후에 김은석 목사가 경기도 김포군 양서면 송정리 만교 최춘선 전도자 자택에 도착하였으며, 저녁에 김포 그리스도인 집회소에서 말씀을 선포하였다. 김포 그리스도의 교회는 최춘선 전도자가 세우고 섬겼던 교회였을 것이 확실하다.1957년 7월 11일 아침에 영등포구 영등포동 48번지 침례회당에서 스가랴 1-3장까지 봉독. 오후에는 경기도 김포군 양서면 송정리 만교 최춘선 댁에서 스가랴 4-6장까지 봉독. 저녁에 또한 김포 그리스도인 집회소에서 스가랴 7-8장까지 봉독함.출처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1952년 5월 교인들의 연보로 내리 318번지의 대지 300평 구입하고 이갑석 목사 최춘선 목사 원경선 권사의 주선으로 미군부대의 지원을 받아 목조예배당 19평을 신축함출처 경기도 부천시 내동교회 교회연혁만교가 최춘선 할아버지의 호(號)였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위 '경기도 김포군 양서면 송정리 만교 최춘선 전도자 자택'이라는 표현에서 '만교'를 지명인 줄 모르고 호(號)로 착각하여 썼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어쨌든 김포의 대지주였고, 김포 인근에서 교회를 개척하셨다는데 근대 자료를 찾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어려워도 찾다 보면 더 많은 이야기가 반겨주리라 여깁니다. 최춘선 할아버지는 현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2묘역에 안장되어 계십니다.김경현@seoulun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