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은상사 인터뷰끝까지 책임지는 기타전문점, 경은상사 *2015년 6월 낙원상가 블로그를 통해 공개한 인터뷰입니다. 인터뷰 김경현사진 성의석 낙원상가 번영회 회장이자 경은상사를 운영하고 있는 김지화 대표님을 만났습니다. 낙원상가와 인연을 맺은 지 올해로 37년. 피아노 조율사로 시작해 기타전문가로 자리매김한 김지화 대표님의 이야기를 통해 낙원상가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낙원상가의 옛 모습을 기억하는 분들께는 추억을 되새김할 살아있는 역사. 우리들의 낙원상가 블로그가 귀담아듣고 왔습니다. 87년부터 낙원상가를 지키고 있는 ‘경은상사’는 무역도 하고 꿈을 거창하게 갖자는 뜻에서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맨 끝 자리여서 ‘코너 하우스’로 시작했던 경은상사는 분식집 이름 같다는 생각에 1년 만에 이름을 바꾸고 27년째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처음에 같이 시작했던, 제가 독립할 수 있게 도와주신 선배분이 계셔요. 양쪽 집 딸들의 이름을 하나씩 따서 경은상사로 했어요.” (웃음) 경은상사를 운영하기 전부터 악기 계통에서 일을 해온 김지화 대표님. 20대 초반서부터 낙원상가에서 일해 올해로 37년, 낙원상가에서 피아노 조율을 배우고 삼익악기 대리점에서 오랫동안 근무를 하다가 다시 낙원상가로 왔다. 왜 악기였을까. 우리는 앞으로의 삶을 운명처럼 마주칠 때가 있다. “왜 악기를 하게 되었냐면 내가 조실부모하고 힘들게 자랐어요. 옛날에는 그런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지만. 우리 외삼촌이 캐나다에 이민을 가셔서 자리를 잡고 사셨거든요. 그때만 해도 부모 없는 조카들은 직계가족초청이 되었는데 직계가족초청을 하려면 캐나다에서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일을 해야 했어요. 그때 유명한 직업이 자동차 정비, 용접, 전선...” 캐나다에서 전화국을 다녔던 외삼촌은 유망한 직업을 적어 보냈다. 위험하고 힘든 일이지만 일거리가 많으니 괜찮다는 말을 덧붙여. 하지만 김지화 대표님의 눈에 띤 것은 피아노 조율사였다. 너무 멋있어 보여 피아노 조율을 배우기 위해 낙원상가에 들어온 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졌다는 대표님의 말씀. 병역문제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바뀌어 버린 이민법 때문에 눌러앉게 된 김지화 대표님은 “모든 일에는 우연찮게 계기라는 것이 있어요.”라고 말한다. 학창시절부터 유난히 좋았던 음악시간, 악기를 연주하지는 못했지만 좋아했던 기타, 연주는 못하지만 피아노 같은 악기를 다룰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시작한 일이었다. 조율을 익히고 조율사로 활동하기 시작한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하고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한 어수선한 시절이었다. 그때부터 불기 시작한 피아노 붐은 피아노 보급률이 많아지고 조율사에 대한 수요도 있어서 20대부터 조율사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렇게 삼익악기 대리점에서 10여년 가까이 근무하다가 돌아온 낙원상가. 중고 피아노 가게를 시작해보려고 점포를 얻으러 동분서주하던 김지화 대표님에게 또 다시 운명 같은 조언이 날아든다. “그 당시 낙원상가에 계시던 현악기를 하시던 선배분이 ‘요새 기타 가게가 잘 되니까 기타 장사를 해보는 건 어떤가.’하고 조언을 해주시고 내가 기타를 좋아하기도 해서 시장조사를 시작했죠.” 전두환 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과외금지를 했던 당시 지금처럼 PC가 많이 보급된 것도 아니라 할 것 없던 학생들이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당시 유행했던 헤비메탈이 한몫을 단단히 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물밀 듯이 몰려와서 기타를 샀던 시절. 김지화 대표님은 정확한 판단으로 시대의 흐름에 몸을 맡겨 기타 가게를 오픈 하게 된다. “처음에는 나도 삼익악기에 있었다고 했잖아요. 그때는 삼익악기에서도 기타가 많이 나왔어요. 그 당시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리던 건 세고비아 기타였죠. 세고비아, 삼익, 영창, 기타 등등의 브랜드 제품들이 있었고요. 몇 년 뒤에 콜트 기타가 시판을 했죠.” 회사 규모들이 지금처럼 크지 않았던 시절이었지만 악기를 구할 수 없어서 기타처럼 생겼으면 다 팔았던 시절이기도 했다. 종로 2가 로터리에는 세고비아, 중앙악기 같은 큰 악기점들이 있었고 지금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가 들어와 있는 건물은 중앙악기가 쓰던 건물이었다. “악기가 얼마나 잘 되었으면, 그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크리스마스 같은 날에는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서 장대로 새치기 못하게 막으면서 팔았다고 하니까. 학생들이 과외도 안 하지 할 것도 없는데 시간은 때워야 하고.” 단군 이래 최고의 호황이었다는 3저 호황의 물결을 타고 순항하던 제5공화국 시절에는 기타를 못 치면 간첩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기타도 치고 멋을 부려야 여학생들도 만날 수 있었다는 그때처럼 최근 다시 기타가 부각되고 있다. 오디션 프로그램 열풍이 불고 세시봉 멤버들이 방송에 나오면서다. “세시봉 시절은 흔히 7080이라고 말하는 베이비부머 세대들이죠. 나도 그 시대 사람이지만 그 시대 사람들은 기타치고 청바지에 생맥주 마시던 세대들이라 기타들을 다들 좋아해요. 지금 은퇴하고 그분들이 다시 기타를 치는 경우가 많아졌어요. 최근 들어 고급 악기의 수요가 늘어난 건 나이 좀 드신 분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분들이 다시 기타를 잡고 색소폰도 불기 시작해서죠. 예전에 하고 싶었는데 살기 바빠서 못했던 취미생활들을 근래에 들어서 많이들 하죠. 고급 악기에 대한 수요가 전보다 많이 늘었어요.” 경은상사는 마틴 수입처로도 알려져 있다. 열의를 가지고 의욕 넘치게 기타 가게를 열고 다른 업체들과 어떤 차별화를 둘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 손님들의 “한국에서 더 좋은 기타를 팔았으면 좋겠다.”는 말에 마틴에 직업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PC도 팩스도 없어서 편지를 보내기 수차례. 미국 LA에서 하는 NAMM SHOW에서 보자는 연락이 왔다. 무역이라는 것을 잘 모르던 때. 코스모스 악기나 중앙악기 같은 큰 회사들 정도만 수입악기를 취급하던 시절이었다. 학교마다 있던 브라스 밴드와 대학교에서 전공하는 학생들을 위한 수요로 클래식 악기나 음향이 많이 수입되었지만 통기타 시장은 워낙 작고 적었다. 기타는 펜더나 깁슨, 전기 기타만 조금 알려지고 야마하, 세고비아에서 수입한 오베이션 정도였다. “그때는 픽업을 엠프에 연결해서 쓰던 방식의 초창기 시절이라서 다까미네라는 일본 기타와 오베이션 정도가 픽업 사운드가 안정적으로 나왔어요. 주로 그 회사들 것을 많이 썼죠. 그 당시 마틴이나 깁슨은 좋은 기타였지만 픽업이 마땅치 않았죠.” 그런 시절, 김지화 대표님이 우여곡절 끝에 미국에서 마틴을 처음 한국으로 들여온 것이 89년. 마틴을 한국으로 들여오자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기타리스트 최희선씨, ‘묻어버린 아픔’이라는 노래를 부르던 김동환씨를 비롯해 세션 연주를 하던 분들이 처음 들여온 여섯 대를 사갔다. 소문을 듣고 한국 통기타의 양대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이정선씨와 조동진씨가 경은상사를 찾아왔다. “마틴 기타를 한국에서도 판다는 것이 뮤지션들 사이에서 소문이 났지만 지금도 보다시피 가게가 작고 초라하다보니까 와서 기타를 보고서는 조금 실망하는 눈치였어요. (웃음) 어쨌든 파는 곳이 우리밖에 없었으니까 필요하면 와서 사가고 음악 하는 사람들을 소개해주고 그래서 10여 년 정도 나 혼자 마틴 기타를 팔았어요. 그때는 기타를 들여와 봐야 일 년에 몇 대 못 팔 때여서 사업적으로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죠. 마틴 기타를 하면서 펜더나 깁슨 같은 일렉기타도 판매를 했었는데 마틴 기타가 하나 판매 될 때 깁슨이나 펜더는 두세 대씩 나가거든요. 그러니까 그럭저럭 유지를 했어요. 내가 좀 열심히 하고 사업적인 역량을 키웠어야 했는데 교만해져서 다른 걸 해볼까 궁리를 하다가 키우지를 못 했죠.” 한국에도 낙원상가에도 가장 힘들었던 시절은 IMF였다. IMF 초창기에 환율이 1700원, 1800원으로 올라 주문한 악기들은 갑자기 두 배 이상 뛰었다. “그래도 다행히 당시에 미사리에 라이브 카페 붐이 일었어요.” 미사리에 불기 시작한 통기타 라이브 붐은 그전에는 한 군데에서 겨우 일하던 사람들이 서너 군데, 심지어 열한 곳을 뛰던 사람도 있었을 정도로 일거리가 늘어났다.“갑자기 일거리가 많아지니까 수입이 올라가잖아요. 그 사람들이 가지고 싶던 기타가 마틴이거든. 그 사람들이 와서 비싸도 좋다고 마틴을 사주는 거예요. 그 위기를 운 좋게 넘긴 기억이 있어요. 추억이죠.” 경은상사 김지화 대표님의 웃음을 보며 옛 낙원상가를 떠올려보았다. 인터넷으로 찾아본 사진 속의 낙원상가는 그 당시로는 최신식 건물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기타를 들고 거리의 낭만을 찾아 떠도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 뒤로 낙원상가가 보이고 사람들이 악기를 실어 나르고 있다. 악기만을 팔고 사는 곳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낙원상가의 옛 모습은 어떠했을까. 1969년 건축가 김수근의 설계로 준공된 낙원상가는 근대화의 상징적인 건물로 남아있습니다. 서울시에서 지정한 미래유산 중 하나가 된 낙원상가. 인터넷을 통해 본 빛바랜 사진 속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낙원상가 번영회 회장이신 경은상사 김지화 대표님과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김지화 대표님이 낙원상가에서 조율을 배우기 위해 왔을 때는 악기점만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 경은상사가 있는 자리도 보이스카웃과 걸스카웃 용품을 파는 가게가 있었고 맞은편은 교복과 교련복을 파는 집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유아용품, 유치원 교재 등을 만들어서 공급해주는 보육사도 지금은 엄청 큰 회사로 발전했지만 그 당시에는 낙원상가에서 시작한 작은 회사였습니다. 낙원상가는 1세대 주상복합 건물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양복점과 가구점, 양품점과 전자제품 매장이 있을 정도의 종합 쇼핑몰 기능을 하고 있었습니다. 낙원상가에 악기 상점이 많아지게 된 건 충무로 있던 악기점들이 오디오 가게나 옷가게에 밀리기 시작하면서였습니다. 충무로 악기상들이 그만두거나 한두 집씩 낙원동으로 올라오고, 탑골 공원 담벼락을 두르고 있던 2층짜리 파고다 아케이드가 헐리면서 그곳에 있던 악기점들이 낙원상가로 와 더 많은 악기점들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다른 점포가 비면 그 자리를 악기가 채우고 비면 또 채우고. 제가 27년 전에 다시 낙원동에 왔을 때는 악기상가로 거의 갖추어져있었어요. 30년 전부터는 본격적인 악기상가로 자리매김한 거죠.” 3층에는 유명했던 낙원 볼링장이 있었고 4층에는 123 캬바레, 허리우드 다방을 비롯해 국제대회가 열리곤 했던 허리우드 당구장이 있었습니다. 2층만 악기상가였던 낙원상가는 우리나라의 소득이 높아지면서 함께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문화에 대한 욕구도 높아지면서 악기시장도 커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앞으로도 악기시장은 점점 커질 거라는 생각을 해요. 내가 마틴 본사에서 열린 인터네셔널 딜러 회의에서 만난 일본 마틴 총판 사장에게 물어봤어요. “한국에서는 기타가 잘 안 나가는데 일본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많이 팔립니까.” 그랬더니, 자기들도 힘들었는데 소득이 2만 불이 넘어가면서부터 반응이 오고 3만 불이 넘어가면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더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한국은 소득이 1만 불도 안 될 때였어요.“ 2015년 한국은 국민소득 3만 달러 진입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나라가 빠른 시간 안에 이렇게 성장하게 된 힘은 어디에 있을까. 아마 이 인터뷰 안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낙원상가에 있으면서 즐거운 일은 없었을까. 다시 이야기를 이어 김지화 대표님께 낙원상가에 있으면서 가장 보람되었던 일을 물었다. “보람이랄 게 뭐 있나. 예전에 저희 가게에 왔다 갔다 하다가 (이제는) 한국을 대표하는 뮤지션으로 성장한 사람들을 보면 뿌듯해요. 저 친구들 어렸을 때 우리 가게에 왔다 갔다 했었는데, 내가 참 예뻐하고 그랬었는데. 이런 사람들이 있을 때 가장 뿌듯하죠. 그리고 내가 옛날에 동경했던 송창식씨, 조영남씨나 우리 때 환호했던 어니언스 같은 뮤지션들을 가까이에서 만나고 친해진 것이 보람이라면 보람이죠. (웃음) 경은상사에는 어니언스 임창제, 해바라기 이주호, 이정선, 양병집, 한대수와 같은 통기타 가수들이 계속 찾아주고 있다. 지금은 모두 아는 국민가수가 된 윤도현씨도 무명일 때는 경은상사를 찾아주었다고 한다. ‘사랑을 위하여’를 불렀던 김종환씨도 무명으로 고생할 때부터 경은상사를 찾았던 뮤지션 중 하나였다. 힘들었던 뮤지션들의 기타를 많이 손 봐줬던 김지화 대표님은 개업하고 얼마 되지 않아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에도 후원의 손을 뻗쳤다. “그때 당시에 영창악기의 영창 기타를 내가 국내에 독점으로 공급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 영창 기타를 선전하기 위해서 어디로 할까 하다가 이 친구들을 한 번 후원 해줘보자 해서...” 노찾사에서 간사 일을 보던 나동민씨의 소개 받아 노찾사 연습실에 기타도 제공해주고 그랬는데 이 소문을 듣고 서울지역 대학 노래패 연합(서대노련)에서 찾아오기 시작했다. 민중음악이 들불처럼 일어나던 시기였다. “대학이 한두 개여야지. (웃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더라고. 영창악기 같은 회사에서는 해줄 수 있을는지 몰라도 영창악기를 가져다 파는 내가 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죠. 조그맣게 가게 하나 하는 건데. 그래서 참 아쉽기는 하지만 그때 내가 다 못 해줬었어요.” 그렇게 알게 된 사람들이 안치환과 故 김광석이었다. “그때 가까워졌어요. 광석씨도 죽기 전에 나하고 굉장히 가깝게 지냈고 안치환씨는 지금도 나하고 아주 친하게 지내요. 그 이후에 대를 이을 걸출한 통기타 스타들이 나왔으면 좋겠는데...” 젊은 친구 중에서 그들의 뒤를 잇는 뮤지션이 나왔으면 한다는 김지화 대표님은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나올 법도 한데 크게 부각되는 스타가 없다.”며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실력 있는 가수들이나 버스킹을 열심히 하는 친구들, 최근 들어서는 홍대광 같은 친구들이 스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대표님은 “광석씨 친구 박학기도 친하게 지내요. 악기장사를 하니까 뮤지션들하고 가깝게 지내지 어떻게 가깝게 지내겠어. (웃음)”라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낙원상가에서 일을 하면서, 경은상사를 운영하면서 힘든 부분은 없었을까. 곤란한 질문일지도 모르는 물음이었다. “작년에는 세월호 참사 때문에 정말 힘들었어요. 전 국민이 힘들었죠. 올해는 메르스 사태 때문에 힘들고. (그런데) 그런 건 국민 전체가 다 힘든 거고요.” 최근 들어서 실질적으로 힘든 건 인터넷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들과 기존 오프라인에서 영업하던 사람들이 서로 시각이나 영업 형태가 다르다는 점이었다. 인터넷으로 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최저가로 팔지만 그 대신에 시장이 무궁무진한 반면, 오프라인은 정해진 사람들과 찾아오는 소수의 사람들을 상대로 이익을 남겨야 하기 때문에 가격 격차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 벽이 점점 사라지면서 운영에 어려움이 생기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부가세가 10%인데 거기에 1년에 한 번씩 소득세도 계산해야하고 그러면 최소한 15%의 자기 마진을 챙겨야 정상적인 상업 활동이 되는데 인터넷 사업을 하는 거의 대부분, 특히 젊은 사람들은 사업 경험이 없고 세무적인 상식이 없어서 아쉬워요. 그러다보니까 ‘500원만 남으면 되지’ 라면서 ‘다른 사람들은 다 도둑놈들이다.’ 라고 하면 손님들이 엄청 몰리긴 하겠지만 인터넷은 다중에게 노출이 되다보니까 전국적으로 여파가 끼쳐서 기존에 오프라인에서 유통을 하던 사람들은 폭리를 하는 사람들로 인식이 되어버리죠. 그런데 그 사람들이 1년을 거치고 세금을 알고 나서부터는 그렇게 못해요.” 인터넷이라는 환경과 새로운 유통과의 싸움이 가장 어렵고 힘들다는 김지화 대표님은 “나머지야 기존에 하던 대로 똑같이 고객들에게 친절하고 서비스 잘 해주고 신용을 지키면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장사의 기본이니까.”라는 말에서 기본이라는 단어를 곱씹어 본다. 기본. 기본. 기본. 낙원상가만의 매력은 뭘까. 경은상사 김지화 대표님이 말한 낙원상가의 장점은 아래와 같다.“낙원상가에 오면 첫째로 다양한 종류의 악기를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시중 어느 악기점에 가도 이렇게 다양한 악기를 볼 수 는 없거든요. 전 세계에서 유일한 거죠. 부산에 비둘기 악기상가(부전 악기상가)라고 있긴 한데 낙원상가의 5분의 1정도 규모고. 외국에는 대형악기점들이 있지만 이렇게 큰 곳도 없고 종류가 다양한 곳이 없어요. 낙원상가에서는 클래식 악기에서부터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소품 악기까지 있는데, 손님들이 쉴 수 있는 의자들과 카페도 생겼고 불편했던 점들을 하나하나 개선하고 있으니까 오시면 편하고 자유롭게 쇼핑할 수 있을 거예요.” 마지막으로 경은상사 김지화 대표님이 덧붙인 이야기로 낙원상가 매장인터뷰를 마친다. 지금까지 나누었던 이야기가 지금까지 우리들이 꾸준하게 낙원상가를 찾았던 이유는 아니었을까 생각하면서. 앞으로 낙원상가를 찾게 되는 새로운 계기가 되길 바라면서. “그동안 우리 가게를 찾아준 많은 고객들 때문에 지금까지 꾸준히 잘 할 수 있었어요. 사러 오실 분들이나 그동안 구입해주셨던 분들이 구입하신 악기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지는 신용이 있는, 신뢰할 수 있는 기타 숍으로 자리매김할 것이고. 앞으로도 전 세계 유명한 기타들을 전문가적인 시각에서 한국에 꾸준히 소개할 거예요. 찾아오시는 고객분들은 소개를 받고 오시는 분들이 많은데 그런 분들에게 실망을 안 주기 위해서 전 직원이 협심해서 노력하고 있으니까 믿고 방문해 주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