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안부安否 21명의 문학 작가에게 보내는 시민의 답장 - 신종원 소설가께 답장을 보내드립니다 - 김수현 님의 답장 - 안녕하세요. 받는 사람의 이름이 없는 편지가 저에게 닿았습니다. 보내주신 편지 감사히 잘 받았습니다. 몇 장의 종이 혹은 디스플레이 뒤에 있는 저는 어떤 모습인가요? 저는 현재 대학생이고 물리학을 배우고 있습니다. 자전거는 못 타지만 가끔 배우고 싶다는 생각은 합니다. 이러한 저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나요? 한정된 정보로 저의 모습을 추측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것입니다. 저 역시 학교에 다니며 회색인영 혹은 이름과 학번으로 구성된 수많은 얼굴들을 마주했습니다. 그렇게 지나간 인연 중 특별히 떠오르는 얼굴이나 이름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의 얼굴을 모른다고 하여도, 서로의 기억에 이름만으로 혹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하여도, 우리가 함께 있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같은 시간에 같은 경험을 나누고, 같은 농담을 들으며 웃었던 순간을 기억한다면, 함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함께 있었노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사실은 나 혼자만의 추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너무 쓸쓸할 것 같습니다. 얼굴 없는 사람들을 마주하면 마주할수록, 저는 그들의 목소리로 그들을 구분하고, 또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깊은 인상을 남길 정도로 튀는 목소리가 아니라면 그 사람의 목소리를 구태여 기억하지 않았는데요, 타인을 구분할 수 있는 정보가 한정되면서 소리로 그들을 구분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얼마 전 저에게는 비대면 수업전환 이후 4학기 만에 처음으로 마이크를 켜고 발표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긴장되고 걱정이 되어 발표문 읽는 목소리를 몇 번이고 녹음하여 들어보았습니다. 처음 목소리를 재생하고 그 소리가 끝날 때까지, 저는 옆에 있는 노트북을 열어 ‘발성 학원’, ‘스피치 학원’, ‘목소리 내는 법’ 따위를 검색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목소리로 나를 드러내야 한다니!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발표는 달라진 것 없는 목소리로 마쳤고, 아무도 저의 목소리에 관해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제 목소리를 듣기 이전으로 돌아가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무도 저의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해도, 내 목소리가 나를 대표하지 않아도, 목소리는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런 의미를 가진 목소리가 이 지경이라니. 절망적이었습니다. 지금은 옅어진 감정이지만 지워지지 않을 기억으로 남으리라 생각합니다. 작가님도 기억에 남는 목소리가 있으신가요? 자신의 목소리가 새삼스럽게 들린 적은 없으신가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 바이러스가 사라진다고 해도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기는 어렵겠지요. 마스크를 착용할 필요가 없는 온라인 만남에서조차 마스크를 찾는 저의 행동을 발견할 때마다 ‘내가 나를 드러내기 부끄러워하는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원래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부끄러울 짓을 한 것도 아닌데 나를 드러내기 어려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스크는 명분일 뿐이라는 걸 깨닫는 데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바이러스를 핑계로 사람과 접촉할 기회를 차단하며, 스스로 고립시키는 데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고 느끼는 요즘입니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으나 더는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만이 남았습니다. 이제는 나와야겠지요. 맨 얼굴을 드러내는 게 힘들더라도, 나의 목소리가 참을 수 없을 만큼 끔찍하게 들리더라도, 언젠가는 이 바이러스가 힘을 잃을 테니까요. 그 후로도 회색 인영 같은 얼굴로 도망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 나이를 많이 먹진 않았지만, 해가 갈수록 관성이라는 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 느낍니다. 개인적으로 과학 법칙의 개념만을 차용하여 전혀 관계없는 현상에 비유하는 것을 정말 꺼리는 편인데요, 관성은 우리 생활에 곳곳에 정말 존재하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를 달리는 버스에 탄 승객이라고 해 봅시다. 현재는 버스가 급정거하여 모든 승객이 앞으로 쏠린 상태입니다. 넘어질 듯한 승객도 보입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면 승객들은 중심 되찾고 정지한 상태에 익숙해지겠지요. 하지만 버스는 다시 출발할 것입니다. 버스가 출발하면 우리의 몸이 다시 뒤로 쏠리며 휘청대는 순간이 분명 존재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내 중심을 잡고 운동 상태에 익숙해질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전처럼 살아낼 것입니다. 횡설수설한 생각들이 제 바람대로 잘 전해졌는지 모르겠네요. 컴컴한 방, 침대 위에 누워서 편지를 읽다가 뜨끔했습니다. 벌떡 일어나 형광등을 켜고 방문을 열어 바깥에 나왔습니다. 겨울 날씨가 이어지다 며칠 만에 다시 가을 날씨가 되었습니다. 단풍 들 시간도 없이 겨울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창밖에 부는 바람에 낙엽이 날리고 있습니다. 돌아온 가을이 얼마나 머무를지는 모르겠습니다. 붉게 물든 잎사귀들이 다 떨어지고 다시 잎이 노랗게 물 드는 때가 오면, 우리는 서로의 웃는 얼굴을 확인 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때까지, 그 이후로도, 잘 지내세요. 저도 잘 지내겠습니다. 2021년 10월 31일 일요일 저녁김수현 드림 김수현저는 대학생입니다.사람이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지만,공연장과 경기장에 가는 것은 좋아합니다.자기소개를 어려워합니다. 프로젝트 안부2021년 코로나19 예술지원 <ART MUST GO ON> 선정작 주관 다시서점후원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기획 김경현성우 강민경디자인 디오브젝트녹음 109사운드 참여작가김민식 김민지 김소연 김연숙 김태형 나희덕 박은영박철 서이제 송경동 신종원 우다영 육호수 이기리이현호 정여울 정훈교 차도하 차유오 한여진 황종권 참여시민강대호 강지영 김수현 안성은 이빈나 이연희 이주연 장유림 정다혜 S * 이 원고의 판권은 출판사와 저자에게 있습니다.* 원고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사용하려면 출판사와 저자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본 프로젝트는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