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정보>
지은이 카를로 진즈부르그Carlo Ginzburg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이탈리아의 저명한 소설가 겸 전기 작가 나탈리아 진즈부르그이다. 그가 지닌 '작가들이 탐낼 만한 필력'은 어머니로부터 유래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곤 한다. 진즈부르그는 1961년 피사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UCLA에 재직 중이다. 그의 연구 범위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부터 현대 유럽사에 이른다. 그는 미시사 방법론(microhistorical methodologies)의 선구자로 꼽힌다.
20세기 역사학의 주류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 독일의 사회사, 프랑스의 아날 학파 등이 주도한 이른바 '거시사'였다. 거시사의 관심은 무엇보다 세계를 과학적으로 인식하는 거대한 이론틀을 정립하는 데 있었다. 특히 아날 학파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가며 대규모로 사료를 개발하였다. 그 사료들은 컴퓨터 공학과 통계학의 발전에 힘입어 계통 있게 분류, 정리되었다. 계량된, 계열화된 사료를 바탕으로 한 구조적 접근은 역사가들에게 설득력 있는 방법으로 받아들여졌다.
진즈부르그의 이와는 달랐다. 그는 개개인의 구체적인 일상과 행동, 그리고 마음을 면밀히 탐색함으로써 복잡다단한 사회 변동의 실상에 더욱 효과적으로 육박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생각은 1966년에 나온 <<베난단티>>를 거쳐 1976년의 <<치즈와 구더기>>를 통해 결실을 보았다. 이 책에는 진즈부르그의 방법적 모색과 역사를 보는 시각이 응축되어 있다. 역사학자들은 주저 없이 이 책을 미시사 및 미시사 방법론의 선구적 업적이자 교과서로 꼽는다.
역사학자 곽차섭에 의하면 미시사란 '사회적 경제적 행위들을 문화적 텍스트로 간주하면서, 구체적인 개인이라는 창을 통해 역사적 리얼리티의 복잡미묘한 관계망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로 요약된다. 진즈부르그는 범주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실제의 이름을 가진 구체적인 인간에 대해 관찰하고 그것을 잘 분석함으로써 그가 살아가는 사회가 어떤 사회이며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지를 살핀다.
실제로 이 책은 우선 다음과 같은 것들에 눈길을 준다; 이탈리아 촌구석의 방앗간 주인 메노키오의 일상과 신변, 무심코 한 행동들이 교회라는 권위와 알력을 빚는 과정(그 결과가 이단 심문), 공식적인 자리에서 한 발언과 이웃에게 내뱉은 말 사이의 비대칭과 모순, 메노키오의 생활 무대 프리울리 지방에 대한 현장 조사 등. 진즈부르그는 이러한 조명을 통해 공식 기록 속에서 박제로 남아 있던 한 인물을 입체적으로 되살려 낸다. 이 과정에서 당대 이데올로기, 심성, 문화, 사회 변동 등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치즈와 구더기>>는 사료 접근과 해석의 엄밀성과 독특한 역사적 상상력을 함께 펼쳐 보인 역작이다. 진즈부르그는 이 책을 통해 일약 유럽 최고의 역사학자의 반열에 올랐으며(브로델이 역사학의 황제로 군림하고 있을 때에, 아날 학파와 맞서는 방법론으로), 나아가 세계적인 학자가 되었다. 1988년 나온 영문판에 대한 서평은 지나칠 만큼 호의적이다.
예컨대 <<뉴욕 리뷰 오브 북스>> 서평; "대단한 책이다. 내용은 재치가 넘치고, 뛰어난 문장은 술술 읽힌다." <<워싱턴 포스트>>의 서평; "진즈부르그가 발견한 메노키오는 민중 문화의 역사적 세계로 통하는 매력적인 관문이다." 들은 이 책에 대한 호평과 열광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개인적인 이력을 놓고 보더라도, 진즈부르그는 이 책으로 자신의 연구와 그 결실을 세계에 알릴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덕분에 UCLA라는 사통팔달의 강단을 얻게 되었고, 이후의 다른 저서들도 계속해서 주목 받게 되었다. 아울러 이전의 저서 <<베난단티>>도 다시 인식되었다.
<출판사 서평>
미크로코스모스! 촌구석 방앗간 주인에 축소 재현된 16세기
"과거의 역사가들은 '국왕들의 위대한 사적'에 대해 알려고만 해도 처벌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 같은 일은 분명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역사가들은 이전의 역사가들이 침묵 속에 묻어버린 것이나, 경원한 것, 또는 단순히 무시해버린 것에 대하여 갈수록 더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작품 속에서 "박식한 노동자"는 이미 이렇게 묻고 있다. "누가 일곱 문을 가진 도시 테베를 건설하였는가?" 그 어느 사료도 무명의 석공들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지만, 이 질문은 여전히 의미 있는 것이다."
-<<치즈와 구더기>> 이탈리아어판 서문에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진즈부르그는 메노키오의 독자적 사고 방식은 지금까지의 역사학이 소홀히 여겨온 민중 문화의 전통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메노키오의 이단적 사고와 독창성은 개인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 같은 사고를 가능하게 한 지속적이고 심층 구조적인 민중 문화가 뒷받침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진즈부르그가 메노키오 재판 기록에서 찾아낸 것은 사료상의 진실 여부가 아니라, 사료의 담론 속에 억압된 민중 문화이다."
- <<치즈와 구더기>> 옮긴이 서문에서
16세기 이탈리아 프리울리 지방에 메노키오라고 불리는 방앗간 주인이 살았다. 그는 딸을 여읠 때 제법 혼수를 마련해줄 정도로 살았고, 촌장 노릇을 할 만한 수완도 있었다. 그는 촌구석에서는 드물게 글을 읽고 쓸 줄 알았고, 조리 있게 자신의 생각을 말할 줄도 알았다. 난독이었을망정, 저급하고 값이 싼 것이었을지언정 그는 꾸준히 책을 읽었다.
그의 입에서는 자주 불경한 소리가 나왔다.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리 - 천지창조와 삼위일체를 부인하며 시쳇말로 다원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나름의 종교관을 피력했다. 그의 생각은 기독교나 회교나 종교적인 위상이 다른 것은 아니라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또한 그는 교회의 권위를 부정했고 성직자의 가혹한 착취와 부정한 축재를 비난했다. 심지어 온갖 기독교(로마 가톨릭) 의식은 인민 대중으로부터 재물을 뜯어내기 위한 사기극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리고 치즈에서 구더기가 나오듯, 신과 인간은 모두 혼돈 속에서 창조되었다고 말했다. 지인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생각임을 분명히 했다.
누가 보아도 이단이었다. 결국 그는 종교 재판(이단 심문)에 걸려들어 투옥과 방면을 되풀이하다, 이단으로 지목된 지 15년 뒤인 1599년 화형당한다.
메노키오는 이웃의 눈에는 별종, 성직자의 눈에는 건방진 녀석이었고 당대 윤리에 비추어 불태워져 마땅한 자였다. 진즈부르그는 평균적인 촌부도 아니고, 전형적인 대귀족도 아닌 인물 - 그러기에 민중 문화와 상층 문화의 경계에 놓인 한 개인을 통해, 그 경계가 드러내는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역사적 구조체를 추적해나간다.
진즈부르그가 특히 주목하는 지점은 먼저 메노키오가 일상에서 떠들어댄 이야기와 공식석상에서 한 발언 사이의 간극이다. 다음 그의 장서와 그의 발언 사이에는 어떤 틈이 있는지 면멸히 검토한다. 이 간극, 이 틈에 16세기 유럽의 역사적 변동을 볼 수 있는 창이 놓여 있다고 본다.
진즈부르그에 따르면, '역사가는 계량적 엄밀성을 중시하는 물리학자나 수학자보다 몸에 나타나는 징후를 통해 병을 알아내는 의사나 짐승의 발자국과 체취를 따라가 결국 사냥감을 찾아내는 사냥꾼의 모습을 더 닮았다.' 이런 생각 때문이겠지만 진즈부르그의 역사 서술은 소설의 구성을 방불케 한다. 일화가, 한 장면이, 지나고 보면 복선이요 암시이다. 메노키오를 비롯한 인물들은 그 성격이 압축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재판 과정의 공방은 할리우드 영화 문법이 특화한 법정 공방 장면 이상으로 흥미진지하다.
역사가는 16세기의 육중한 교회 문서로 남은 메노키오에게 조용히 말을 건다. 하찮은 문헌과 촌사람들의 증언이 이에 화답한다. 개인의 삶이 구체화되면서, 더불어 사회 변동의 실상은 세부가 풍부한 이야기가 된다.
치즈와 구더기: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 / 카를로 진즈부르그 (U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