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아직 언어재활사입니다 / 곽경미

<책 주요 내용>

#고구마를 먹는 시간

1교시 수업하기 싫어 거짓 울음으로 떼를 쓰는 아동

2-3교시 아동 평가 아이의 전반적인 평가를 위해 초집중 평가 전 ·후 부모 상담

4교시 어르고 달래 수업 하는 아동

5교시 여러 번 반복해야 겨우 한 가지 지시를 이해하는 아동

6교시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자해하는 아동

7교시 한계를 알고 우울해하는 아동

8교시그룹: 학교가기 위해 준비하는 아동들

9교시 남과 비교되는 순간마다 입을 꼭 다무는 아동

나의 하루는 매 순간 고구마를 먹는 시간이다. 화가 울컥, 한숨을 푸, 답답한 마음을 꾹꾹 누른다. 이런 내 모습을 볼 때마다 이 일을 계속 해도 되는 지, 제대로 하고 있는지, 내가 원하던 삶이었는지를 고민한다. 고민의 결과는 항상 같다. 일을 빠른 시일 내로 접는 것. 하지만 언제고 불쑥 튀어나오는 이 마음은 제대로 실현된 적이 없다.

#이별은 갑작스럽게

깊게 팬 주름과 피곤으로 가득한 부인이 휠체어에 중년의 남성을 태워 나를 찾는다. 그는 좌뇌가 없는 환자로 나를 보자마자 말한다.

“최 OO”

“김 OO”

부인은 아무 감정 없이 이름을 정정해준다. 하지만 환자는 웃는 얼굴로 또다시 낯선 이름을 부른다.

“최 OO”

“나를 자기 첫사랑 이름으로 불러요. 늘 상 있는 일이예요.”

할 수 있는 표현이라는 게 고작 첫사랑의 이름이라니. 부인은 첫 사랑의 이름을 부르는 남편을 볼 때마다 어떤 마음일까? 괜히 민망해서 부인의 눈치를 보자 나를 향해 지친 미소를 짓는다.

“이런 사람도··· 언어치료가 돼요?”

#793회기 : 너와 내가 만난 시간 10년

“선앵임 미용실(장난감) 가져와요.”

“선앵임 택 바요.”

“선앵임 마이뚜 두세요.”

“내가 엄마 부어요.”

총 793회기. 너와 내가 만난 시간 10년. 이 병원에서 근무한지 10년, 이 아동을 언어재활한지 10년. 의미 없이 모방만 하던 네가 세 개의 단어를 연결해 한 문장으로 표현하기까지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어. 누군가에게는 의미 없어 보일지 몰라도 우리에겐 너무도 소중한 일이야. 첫 만남, 우리가 마주할 때 나를 뚫어져라 보던 너의 눈빛이 아직도 생생해. 어떤 의도도 없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따르던 너. 스스로 탐색하여 활동을 진행할 수도 없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은 원하는 것을 찾아 표현할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해. 비록 3어절 문장 표현이 많지는 않지만 큰 변화야. 그렇지?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어머니만 포기하지 않으면 저도 포기하지 않아요.”

나는 고민하는 언어재활사가 되고 싶다. 여전히 모르는 것도 서툰 것도 많지만 내게 온 아동들을 위해 고민하려고 노력하는 언어재활사가 되고 싶다.내게 주어진 이 시간이 내 아동들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그때의 다짐을 잘 지키고 있을까? 10년이 지나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버린 나는 그때와 같은 걸까?

<저자 소개> 곽경미

12년차 언어재활사.

언어재활을 위한 교구도 만들고, 언어재활사 커뮤니티 SLPHOUSE 운영.

그만 두고 싶지만 그래도 아직 언어재활사로 일하고 있습니다.